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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김삼순 ? 지수현


1. 대한민국에서 노처녀로 산다는 것은

“나이 서른 먹은 여자에게 연인이 생기기란 길에서 원자폭탄을 맞는 것보다 어렵다.”

예전에 본 독일 영화에서 들었던 대사를 떠올리며 여자는 숨을 삼켰다. 전에는 그 대사에 코웃음을 쳤었다. 하지만 이 화창한 봄날의 오후, 호텔 커피숍에서 ‘맞선’이라는 것을 보고 있는 지금에 와서 ‘나이 서른 먹은 여자에게 연인이 생기기란 길에서 원자폭탄을 맞는 것보다 어렵다.’는 그 대사는 정말 새록새록 뼈에 사무쳤다.

“나이가… 서른이시라구요?”
“스물 아홉이에요.”

감히 멀쩡한 20대를 30대 취급하는 눈앞의 맞선남에게 그녀는 이를 갈며 쏘아 붙였다. 그러나 그녀가 도끼눈을 뜨고 정정한 사실에 남자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스물 아홉이나 서른이나 그게 그거죠.”

남의 가슴에 비수를 꽂으며 쌍화차를 홀짝거리는 눈앞의 남자를 그녀는 그 순간 할 수만 있다면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자신에게 이런 남자를 소개 시킨 엄마 친구 진숙이 아줌마에게 악을 쓰고 싶었다. 어떻게 저런 폭탄을 괜찮은 킹카라고 속여서 날 이런 자리에 불러낼 수가 있나? 문득 그녀는 맞선이라는 굴레로 자신을 꼬득였던 진숙이 아줌마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얘, 더 두고 볼 것도 없어. 나이는 딱 너랑 네 살 차인데, 네 살 차이면 더 볼 것도 없는 거야. 직장 든든하겠다. 그 사람이 또 요즘 사람답지 않게 너무 어린 여자는 싫다고 한다더라. 요즘 애들 말로 킹카, 딱 그거지.”

하지만 눈앞의 ‘킹카’를 처음 본 순간 그녀의 머리는 심각한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킹카? 언제부터 킹카가 폭탄과 같은 뜻이 되었나? 눈앞의 맞선남의 머리는 정확히 8대 2로 가르마를 하고 있고, 네모난 얼굴에 네모난 뿔테 안경, 그나마 잘 닦지도 않았는지 안경알은 먼지로 뿌애 보인다. 콧구멍이 여실히 드러나 보이는 들창코에 아프리카인의 후예인지 의심이 가는 두툼한 입술, 빨간 땡땡이 무늬가 찬연히 빛나는 웃기는 넥타이에 맞선에 나와서 쌍화차를 홀짝이는 죽이는 센스… 이게, 이게 정녕코 킹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는 남자의 모습이더란 말이냐. 오, 마이 갓!

저 남자랑 만에 하나라도 결혼하게 된다면 죽을 때까지 저 두툼한 입술에 입맞추고 살아야 한단 말이야? 어쩐지 그 생각에 파르르 소름이 돋고 있던 그때 맞서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제과 일을 하고 계신다고요? 저 여자가 일하는 것 무지 찬성입니다. 만약 제 아내가 일을 한다면 전폭적으로 지지해 줄 생각이에요.”

흠, 그것 하나는 괜찮군.

“요새 강사 월급으론 생활하기가 참 빠듯해서 말이죠. 철없는 사람들이야 나이 어린 여자 애들 좋다지만 이쁜 게 밥 먹여 주나요? 역시 여자는 생활력이 있어야...”

괜찬다는 것 취소다. 이쁜게 밥 먹여 주냐고? 내가 안 예쁘다는 소릴 그렇게 돌려가며 해야겠니? 저는 8대 2 가르마 주제에! 문득 그녀는 다시 이 화창한 봄날에 맞선 보는 남녀들이 쌍쌍이 모여든 이 우스꽝스런 호텔 커피숍에서 이런 폭탄과 마주보고 앉아 찻잔을 홀짝이고 있는 지금 자신의 처지가 기가 막혔다. 다섯 달 전, 그러니까 작년 크리스마스 때만 하더라도 그녀 자신이 이런 코미디를 연출해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비록 바다 건너 외국에 유학 중이라곤 하나 근사한 남자친구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다섯 달 전 운명의 그날이 오기 전까지 그녀에게 ‘맞선’이란 100만 광년이나 거리가 먼 소리였다. 적어도 바다 건너 그녀의 애인에게서 다음과 같은 전화가 걸려오기 전까지는…

***

“메리크리스마스. 그리고… 우리 헤어지자.”

감이 먼 전화 목소리조차 언제나 그윽하다고 생각했던 남자친구 영우는 그 그윽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처음에 여자는 그가 농담하는 줄 알았다. 아니면 파티쉐(제과 기술자)로선 1년 중 가장 바쁜 크리스마스 대목을 치르고 나서 파김치가 된 나머지 귀에 환청이 들리는 게 아닐까. 만약 농담이라면 하필이면 크리스마스에 이 따위 농담을 하다니. 기분이 영 찜찜헸지만 그래도 그 정도의 농담은 얼마든지 넘어가 줄 수 있었다. 그래, 그와 자신이 어디 1,2년 사귄 사이이던가. 이 정도면 귀엽게 봐 줄 수도 있지.

그래서 여자는 남자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장난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깜짝 놀랐지?”라고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30초라는 무지 긴 시간 동안 기다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화선 너머에선 무거운, 그리고 불편한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다. 아무래도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자는 가까스로, 목이 졸려지는 것 같은 느낌을 참아가며 전화선 너머 남자에게 물었다.

“지금 농담하는 것 아니야?”

언뜻 전화선 너머로 한숨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연이어 남자가 다시 말했다.

“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구.”

에, 그렇게 해서 스물 여덟 살의 성탄절에 그녀는 세상에 살고 있는 다른 여자들은 크리스마스 때만큼은 잘 하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꽤 오랫동안 사랑해왔던, 그래서 인생을 함께 하게 되리라 생각했던 남자에게 차인 것이다. 이런 제기랄!

***

남자와 여자가 연애를 끝내는 데도 일정한 형식이 있다.

우선 첫번째, 자신들의 연애가 끝났음을 인정한다. 두 사람이 더 이상 연인 사이가 아닌 남남이 되었다는 그 사실을 말이다. 양쪽 모두 서로에게 흥미를 잃었을 때는 이 단계가 그런대로 쉽다. 그러나 그녀의 경우처럼 일방적으로, 갑자기 뒤통수를 맞는 경우에는 이 단계가 몹시도 어렵다.

상대남(혹은 상대녀)에게 무한대의 증오심을 느끼고, 이런 식으로 차였다는 데에 대하여 자기 연민을 느낀다. 또 마음의 위로를 위해 알코올에 기대거나 폭식 등등의 만행을 일삼아 체중이 갑자기 급속도로 ;팡 튀김’이 되는 불상사가 생긴다.

이 과정을 지내는데 얼마나 걸릴지, 어느 정도의 후유증이 생기는 지는 개인차가 크다. 어쨌든 이 모든 과정을 거치고도 살아 남았다면 이제 실연의 마지막 단계가 기다리고 있다.

“이게 다야?”

그녀가 가지고 나온 라면박스를 흘끗 쳐다보며 둘째 언니가 묻는다. 언니의 질문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자 안에 담겨 있던 것들을 빈 드럼통 안으로 쏟아 부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 자신을 가차 없이 차 버린 나쁜 놈과 좋았던 시절 함께 찍었던 사진 앨범, 그 녀석에게 받았던 카드, 편지, 선물, 함께 들었던 음악 CD등등이 우르르 소리와 함께 드럼통 안으로 굴러 떨어졌다. 두 여자는 그것들 위에 참으로 비장한 얼굴로 휘발유를 쫙쫙 들이 부었따.

그것은… 화형식이었다. 끝장난 연애의 증거물들, 끝장난 사랑을 태우는 화형식이었다. 바로 실연의 마지막 단계. 자신에게 남아 있는 상대의 흔적을 지우는 그 단계에 그녀는 그렇게 도달한 것이다. 집안에선 담배 피우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동네 슈퍼에서 급조해서 사온 300원짜리 라이터로 불을 붙이기로 했다. 바로 그때…

“잠까안!”

그녀의 화형식에 입회하고 있던 언니가 단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목에 걸고 있는 것 뭐야? 손에 끼고 있는 건? 민영우, 그 인간하고 연관 있는 건 뭐든 다 태워 버리겠다고 하더니! 그건 왜 안 태워?”

언니의 예리한 지적에 여자는 속으로 찔끔했다. 과연 그녀의 손가락에는 영우가 만나지 100일 되던 날 선물했던 백금 실 반지가, 목에는 2년 되던 날 받았던 18L 목걸이가 반짝이고 있었다. 5초 뒤, 여자는 조금 방어적인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아, 아깝잖아. 그래도 금붙이인데.”
“흥, 아직 그놈한테 미련이 있는 건 아니고?”

비꼬는 듯한 언니의 목소리에 그녀의 입술에선 반사적으로 우렁찬 반박이 튀어 나왔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언니? 내가 미쳤니? 약 먹었어? 이 따위 병아리 똥 같은 금붙이 때문에 그 자식한테 미련 갖게? 그냥 지금 경제적으로 몹시 곤궁한 처지니까 나중에 팔아서 술값에 보태려고 그러는 거야!”
“…”
“그놈이 준 사랑의 정표가 맥주 한 박스로 둔갑하는 꼴을 봐주는 것, 그게 바로 나의 복수다, 이 말씀이야!”

실연 직후 홧김에 퍼 마시고 먹은 맥주와 소주, 순대, 떡볶이로 인해 12킬로그램이나 체중이 뻥튀김 된 주제에 헤어진 애인이 준 정표를 팔아 다시 술값으로 보충하겠다니. 음, 그렇게 퍼 마시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단 말인가 그러게 약간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언니 앞에서 그녀는 철컥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휘발유를 듬뿍 머금은 드럼통 속 내용물들 위에 선홍색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불길을 묵묵히 지켜보던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찔끔 흘러 나왔다. 어지간해선 잘 울지 않는 그녀였으나, 크리스마스 날 애인에게 채인 것은 눈물이 인색한 그녀로서도 울어 제끼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처음에는 한두 방울 흘러내리던 눈물이 이제는 고장 난 수도꼭지 물마냥 흘러 넘치기 시작했다.

“흐으어어어어어엉. 나쁜놈! 어떻게 전화 한 통화로 달랑 헤어지자고 하냐! 어어어어엉!!”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서 언니가 내미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팽!’ 소리가 나게 코를 푼 뒤, 여자는 비장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언니야, 나 지금 하늘에 두고 맹세한다.”
“뭘?”
“내가 다시 겉가죽만 번드르르하고 인간성 엿 같은 놈하고 사귀면 내 성을 간다! 알았지? 언니가 그 맹세의 증인이야. 그러니까 내가 다시 어떤 남정네 겉가죽에 홀려 그 더러운 성질을 봐 줄 것 같은 기미가 보이거든, 인연이 아닌 놈에게 정신 팔 것 같아 보이거든, 언니가 잽싸게 내 머리를 있는 힘껏 후려쳐서 제 정신이 들도록 해 줘.”
“흠, 결국 그렇다는 것은 앞으로도 겉가죽 번드르르하고 인간성까지 좋은 남자를 사귀겠다는 말?”

그 질문에 여자는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이며 불타는 눈동자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

하지만 겉가죽 번드르르하고 인간성까지 좋은 남자를 찾기란 정말 길에서 원자폭탄 맞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그녀가 깨달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쌍화차를 홀짝이며 “월 수가 얼마나 되느냐?”. “시부모 예단은 얼마나 가져올 수 있느냐?” 짖어대고 있는 남자가 결국 스물 아홉의 그녀가 맞선 장소에서 만날 수 있는 현실이었던 것이다. 맞선 시작 30초 만에 상대 남에게 흥미를 잃은 여자의 시선이 호텔 커피숍을 따분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한 테이블 건너 한 쌍씩 다 맞선 보러 나온 인간들이구나. 참, 대한민국에 결혼 못한 인간들 무지 많네. 저 인간들 모두 나같이 꿀꿀한 기분일까?’

꿀꿀한 기분일 때면 늘 그랬듯이 여잔 손가락으로 톡톡 자기 앞 테이블을 두들겼다. 바로 그때, 그 ‘맞선의 왕국’에 앉아 있는 남자와 여자들을 멍하니 쳐다보던 그녀의 시야에 우연히 건너 테이블의 남녀가 포착되었다.

***

처음 그녀가 그의 존재를 느낀 것은 소리였다. 그녀 자신처럼 지루함을 담아 탁자를 톡톡 건드리는 손가락 소리, 그 소리를 따라 옮겨진 시선의 끝에 ‘그’가 있었다. 남자는 상당히 멀끔해 보이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일단 겉가죽만 봐서는 지금 그녀의 상대로 나와있는 8대 2가르마보단 100만 배는 괜찮아 보인다. 앉아 있어서 키는 모르겠지만 봄볕에 약간 그을린 피부에 뚜렷한 이목구비, 숯 검댕이 눈썹하며, 날렵해 보이는 반 무테 안경을 쓰고 있는데, 안경 쓴 남자가 저렇게 근사해 보이기는 처음이다. 맞선을 주선한 진숙이 아줌마에게 보여주고 “봐요! 아줌마, 킹카란 바로 저런 거라고요!”라고 알려주고 싶을 정도다.

그런데 그 멀끔한 킹카 남자, 지금 입으론 예의 바르게 킹카표 미소를 흘리고 있는데 눈으로는 심히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런 썩을! 대한민국에서 할 짓 없는 인간들은 오늘 여기 다 모아 놨구만! 바빠 죽겠는데 이 따위 커피숍에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킹카남 장도영은 지금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쌍소리를 그렇게 애써 눌러 참고 있었다. 눈앞의 상대녀는 뭐 그런대로 봐 줄 만하나 외무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산호색 립스틱을 바른 탐스런 입술에서 나온다는 소리는 고작…

“숙모님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집안끼린 꽤 오래 알고 지낸 사인데 이렇게 뵙기는 처음이네요. 그 동안 왜 모임에 잘 나오지 않으셨어요?”

등등의 하품 나올 소리 뿐이었다.

“뭐, 제가 워낙에 사람 많은 곳엔 잘 가지 않는 소심한 성격이라서요.”

적당히 예의 바르지만 성의 없는 그 대답에 맞선녀의 얼굴에서 언뜻 실망의 표정이 잠깐 스쳤다. 사실 맞선 장소를 이런 격이 낮은 호텔 커피숍으로 잡은 것부터가 맞선녀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배경을 생각해 볼 때, 그리고 그의 훤칠하고 아리따운 자태를 보면서 여자는 내심 ‘잘해 보리라!’를 부르짖었다. 그래서 입가에 더욱더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지금은 다른 일을 하시고 계신다 들었지만, 곧 집안 일로 복귀하시겠지요?”

그것은 맞선녀의 입장에선 맞선 보면서 충분히 물어 볼 수 있는 질문 거리였다. 하지만 순간, 킹카남의 머릿속에선 ‘뚝’하고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어머니가 당장 2주에 한번씩 선이라도 안 보면 족보에서 파버리시겠다고 눈물로 협박을 하셨기에 어쩔 수 없이 나온 자리여서 별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한계다.

“저도 질문 한 가지 해도 되겠습니까?”

남자는 느닷없이 영업용 미소를 날리며 그렇게 물었다. 이제까지 승마나 오페라를 좋아하느냐, 좋아하는 음식이나 여자 타입이 따로 있느냐는 질문에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남자의 느닷없는 질문에 맞선녀는 생긋 미소 지으며 허락했다.

“물론이에요, 뭐든 물어보세요.”

그런 여자에게 남자는 마주 미소 지으며 물었다.

“저기요, 그 쪽은 저하고 키스 내지는 포옹, 최종적으로 한 침대에서 같이 뒹군다는 게 상상이 가십니까?”

그의 예의 바른 나긋나긋한 말투에 잠시 질문의 요지를 간파하지 못한 맞선녀가 그 뜻을 알아듣기까지 대략 30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네?”

30초 뒤 그 질문의 음흉함을 알아듣고 맞선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자 남자는 무척이나 정중한,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다음 대사를 읊어댔다.

“만약 일이 잘 되어서 그 쪽과 제가 결혼까지 간다면, 저희 부모님께선 1년 안에 소주를 보길 원하시거든요. 그럼 그 쪽과 제가… 죄송합니다. 그 쪽 성함을 까먹어서요. 적어도 두 달 이내에 아이를 만들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남녀가 아이를 만들려면 키스 내지 포옹 내지 한 침대에서 같이 뒹구는 건 기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아까부터 노력을 해 봤지만 도대체 그 쪽하고 제가 그런다는 게 상상이 안되어서… 그 쪽은 상상이 되시냐구요.”
“…”
“상상도 안 되는 상대하고 키스에서 섹스, 출산까지 해치울 수 있을지 약간 갈등이 생겨서요. 뭐 그 쪽에서 상상이 되시고 절 덮쳐 버리실 수 있다면 그도 좋을 것 같긴 한데, 그건 또…”

거기까지. 맞선녀가 들어 넘길 수 있는 한계는 거기까지였다. 새파랗게 질리던 얼굴은 다시 새빨갛게 달아 오르고, 여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직도 싱글싱글 웃고 있는 킹카남에게 이렇게 악을 썼다.

“뭐, 뭐.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그리곤 자기 입 밖으로 나오는 우아하지 못한 뭇소리에 본인이 놀랐던지 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더니 남자에게서 등을 돌려 재빨리, 거의 광속 수준으로 호텔 커피숍을 나가버렸다. 그 순간 그들의 건너편 자리에서 그 모든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경해 버린 여자는 볼 수 있었다. 상대가 나가고 홀로 자리에 남은 킹카남이 느긋한 태도로 자기 앞 빈자리를 처다 보고 씨익 웃으며 “게임 아웃!”이라고 뿌듯한 어조로 중얼거리는 것을. 그것은 정말 ‘사악’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그런 웃음이었다. 그때, 그의 미소를 건너편에서 몰래 구경하고 있던 여자는 조금 전에 퇴장한 맞선녀와 똑 같은 생각을 했다.

‘뭐, 뭐, 뭐 저런 싸이코 같은 인간이 다 있어?’

눈 앞의 8대2 가르마의 폭탄과 겉가죽이 번드르르하지만 사이코 기질이 다분한 저런 인간 중, 어느쪽이 더 맞선에서 최악의 상대인지 여자는 잠시 헷갈렸다. 하지만 문득, 그 와중에도 반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싫은 상대하고 시간 죽일 필욘 없지!

“결혼하면 저희 무모님하고 할아버님, 누이동생 들까지 같이 살아야 하는데, 물론 그 쪽에서 아파트라도 장만해 주시면 문제는 틀려지지만요… 어, 제 말 듣고 계십니까?”

사태 파악을 못한 채 아직까지 열심히 떠들고 있는 8대2가르마에게 순간 여자는 씨익 미소 지었다. 그녀 자신은 모르고 있으나 방금 전 그 킹카남이 맞선녀를 상대로 지었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미소를.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점심땐데 배고프지 않으세요? 날도 더운데 우리 몸보신 좀 하죠. 혹시 보신탕 좋아 하시나요? 제가 잘 하는 고을 알고 있는데.”

***

기념할 만한 그녀의 첫 번째 맞선은 고맙게도 실패로 끝났다. 대학 강사라는 8대2 가르마는 금방 토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재빨리 그녀에게 ‘안녕’을 고했던 것이다.

“30살짜리 여자는 남자 만나기가 길에서 원자폭탄 맞는 것보다 어렵다더니, 제기랄! 폭탄 맞으러 나왔다가 정말 폭탄을 만날 줄 누가 알았겠어?”

커피숍 근처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 입으면서 그녀는 투덜거렸다. 사실 그녀는 오늘도 출근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이 있다.’라는 핑계를 대고 얻어낸 시간은 겨우 반나절, 만약 오늘 나온 남자가 폭탄이 아닌 운명의 상대였다면 그녀는 직장에서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남자에게 오늘 하루를 투자하리라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나온 것은 운명의 상대가 아닌 폭탄이었다. 이제 그녀에게 우선 순위는 남자가 아닌 밥벌이 일자리인 것이다. 해서 그녀는 지금 상대남과 찢어지자마자 재빨리 화장실로 달려와 커피숍 카운터에 맞겨 두었던 편한 옷을 갈아입으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입고 있던 투피스 상의를 벗고있던 바로 그때, 그녀에게 재앙이 찾아왔다.

“헉! 브, 브래지어가!”

실연 후 갑자기 살이 쪄서 그녀의 보기 좋게 글래머틱 했던 몸은 글래머의 수준을 넘어가고 있었다. 옷 갈아입느라 팔 좀 뻗었다고 입고있던 브래지어 끈이 툭 떨어져 나갈 만큼 말이다. 그렇게 돌발사태에 당황하고 있을 무렵,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누군가 그녀가 있는 화장실 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똑똑.

여자는 반사적으로 그 신호에 응답하고자 팔을 뻗으려 했지만 그러자니 다시 그 염병할 브래지어가 흘러내릴 판이다 발로 차서 노크를 대신 하려니까 주제에 고급호텔의 고급 화장실이라고 서 있는 자리에선 발이 문에 닫질 않는다. 할 수 없이 여자는 반쯤 벌거벗고 가슴을 부여안은 엉거주춤한 포즈로 문 앞까지 바싹 다가갔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닫혀있던 화장실 문이 확 열어 제껴진 것은.

여자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그리고 그것은 열려진 문 앞에 서 있던 남자, 방금 전 그녀의 건너편에서 맞선을 보았던 그 킹카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 황당한 사태가 꿈인지 생신지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두어 번 눈을 깜빡였지만 아무리 여러 번 눈을 깜빡여도 눈앞의 남자는 사라져 주지를 않았다.
그 순간 무거운 침묵이 납덩이처럼 그들을 내리 누르기 시작했다. 7초쯤 후, 자기 맞선녀를 보았을 때처럼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숱 많은 눈썹을 찌푸리면 남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서 지금 뭐 하는 거요?”

사실 이런 상황에선 그녀는 비명을 질러야 마땅했다. 하지만 남자의 준엄한 질문에 여자는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대답했다. 브래지어를 부여잡고 있는 손만큼이나 부들거리는 목소리로.

“오. 옷 갈아입고 있는데요?”

아니, 이 남자가 지금 척 보면 모르냐? 그게 아니면 지금 당신 눈에 내가 뭘 하는 걸로 보여? 빨리 잽싸게 그 뭄 못 닫아? 앙? 이 치한아? 그렇게 핏발 선 눈으로 자신을 째려보는 여자를 보며 남자는 별 이상한 소리를 다 들어본다는 듯한 차가운 얼굴로 시니컬하게 물었다.

“남자 화장실에서?”

그 순간 여자의 귓가에는 지옥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그제서야 들어올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어깨 너머에 있는 반짝반짝 한 사기로 만들어진 남자용 소변기와 곳곳에 써 붙여진 ‘MAN’이라는 글씨들이.
그때, 남자의 낮은 하지만 좁은 공간에서 똑똑히 울리는 낭랑한 목소리가 여자의 귓가에 선명하게 내리 꽂혔다.

“당신, 호시 변태 아니야?”

사이코 남에게 변태녀 소리를 듣다니. 대체, 오늘 일진이 왜 이모양인 거야? 도대체 왜? 왜? 왜!!

하지만 그녀의 하루는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2. 복수는 달콤하기보다 매콤하다?

창가에 봄 햇살이 부드럽게 비춰 들어오고, 공간 가득히 바닐라 향기가 넘쳐 나는 ‘아름답고 맛있는 장소’, 아니, ‘아름답고 맛있어 보이려고 인테리어에 상당히 공을 들여 빵 맛은 그 보다 좀 못한’ 비싼 빵집. 그것이 그녀가 일하는 고급 양과점 ‘낭트’의 오후 풍경이었다. 그녀는 세상의 다른 무엇보다 오븐에서 빵을 막 꺼낼 때 콧가에 살짝 스치는 이 바닐라 향기를 가장 사랑했다. 그녀가 처음 바닐라 향기를 맡은 것은 여섯 살 때 였다. 자식이 많았던 그녀의 엄마는 그 하나하나에게 전부 생일 케이크를 해 줄 수 있는 형편은 못 되었었다. 그래서 그녀의 생일 때 엄마는 동네 제과점에서 케이크를 사 주는 대신 하얀 밀가루에 황금색 계란 노른자, 설탕, 바닐라 향을 섞어 반죽을 해서 프라이팬에 카스텔라를 구워주시곤 했다. 막 구운 빵에서 묻혀 나오는 바닐라 향기. 비록 어른이 된 그녀는 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이제 그것은 직업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이 바닐라 향만큼 사랑스러운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적어도 그 향기와 더불어 저런 잔소리만 같이 실려 나오지 않는다면 말이다.

“봄이라 약혼 결혼 그야말로 우리 업계에서는 크리스마스 다음으로 대목 시즌이라는 거 압니까? 모릅니까?”
“…아는데요?”
“오호! 그럼 일하는 쪽에서도 좀 더 부지런해져야 한다는 것도 알겠네요. 미스 김?”

꼭 기숙사 사감 같은 딱딱한 말투로 매장의 매니저 는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바꿔 말하면 그것이 이런 뜻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아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오동통한 몸으로 되지도 않게 선 같은 것 본답시고 근무시간을 야금야금 까먹으면 곤란해! 한번만 더 이러면 시간당 월급에서 깎아 버리고, 거기서도 정신을 못 차리면 모가지야! 이 불경기에 실업자 되고 싶나? 앙?’

그 순간 ‘자르고 싶으면 잘라! 이 대머리야!’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그녀는 가까스로 참았다. 말 그대로 지금은 새 일자리를 구하기가 너무 어려운 불경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화를 참고 매니저의 손짓에 따라 방금 가게 안에 들어온 손님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간혹 약혼 케이크를 자기들 취향에 맞게 직접 주문한답시고 직접 파티쉐와 면담을 청하는 손님들이 있었던 것이다. 과연 미팅 룸에는 한 눈에 봐도 곧 약혼을 코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젊은 한 쌍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약혼을 축하드리고요, 케이크 컨셉은 아무래도 봄이니까 좀 화사하게…”
“어머?”

그 방에 막 들어선 그녀가 아직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막 의례적인 인사를 던진 바로 그 순간 그녀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 오랜만이다! 나야, 나! 오미영! 기억 안나? 왜 우리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잖아. 어머, 너 여기서 일하니?”

깅거이 안 날 니가 있나, 그렇게 저 이쁘다고 이쁜 척을 다 하고 다녔는데, 꼭 반에 하나씩 있지 않은가. 인형같이 생긴 외모를 소유하고 자신이 예쁜 줄 너무나 파다하게 자각하고 있는 미녀가. 귀신같이 자기가 휘두를 수 있는 상대를 골라내어 시녀로 데리고 다니고 싶어하는 공주 말이다. 오미영은 바로 그 공주였고, 그녀는 그 시녀 노릇을 강요 받았었다. 뭐 워낙에 게을러 남의 시녀 노릇은 못하겠어서 고등학교 2학년 그 1년 동안 이 여자 피해 다니느라고 정말 고생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참, 10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을 만큼 고약한 기억이었다. 하지만 10년 만에 만난 동창을 “누구시죠?”라고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법.

“어, 미영아. 정말 오랜만이다. 너, 약혼하니?”
“응, 나 재작년에 보스턴에 유학 갔지 뭐니. 거기서 만났어. 너는 이렇게 적성에 맞는 튼튼한 직장에서 열힘히 땀 흘려 일하는데 나는 아직 학생이지 뭐야. 보스턴 유니버시티면 그다지 나쁘진 않지만. 뭐 그래도 세상에 학벌이 전부는 아니야. 그렇지? 그래도 일찍 포기하고 적당한 데 주저앉기보다 변화를 추구하고 싶었는데 글쎄 내 운명의 상대가 거기서 딱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겠니? 너는? 넌 결혼했니? 아님 다른 사귀는 사람이라도?”

저렇게 짧은 시간에 숨도 안 쉬어 가며 다다다 말 할 수 있는 것도 재주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 짧은 시간에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만 저렇게 다다다 뽑아낼 수 있는 것도. 대체 남이 결혼 했는지 안 했는지 애인이 있는지 없는지 왜들 그렇게 궁금한 거야? 없다고 대답해도 소개팅 한 번 시켜주지 않는 족속들이!

‘아무튼 20대 후반 여자에게 “너, 결혼했니?”라는 질문을 하는 건 법으로 금지시켜야 해! 제기랄! 대한민국 헌법에는 왜 그런 조항이 없는 거야?’

그렇게 속으로 이를 갈면서 겉으로 어정쩡하게 웃던 그녀의 미소는 고교동창의 옆에 등을 돌리고 서 있던 남자의 얼굴을 보게 되면서 확 사그러 들었다.

“아.”

그 남자의 얼굴을 보면서 그 순간 그녀가 내뱉을 수 있는 소리는 그것이 전부였다. 지구에는 63억의 인구가 살고 있고 그 중 절반은 남자니까 이 남자를 여기서 보게 된 것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어째서 지금 저 남자가 여기 있단 말인가. 크리스마스 날 그녀하고 헤어져야 할 정도로 해야 할 공부가 많다고 했던 남자가. 그것도 그녀의 고등학교 동창의 약혼자로!

숨이 턱 막히고, 뒤통수를 무언가 둔탁한 것으로 얻어 맞은 것 같은 얼얼한 충격을 느끼고 있는 그녀와, 그런 그녀를 난처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남자 사이에 해맑은 미영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인사해. 내 약혼자 민영우씨. 아직 약혼식은 안 했지만 작년 크리스마스 때 청혼 받았어. 어때? 근사하지? 얘, 너도 좋은 사람이 곧 생길 거야. 살 좀 빼고 미용실에 가서 가꾸기만 하면 너도 못 봐줄 인물은 아니니까.”

신이시여! 나, 오늘 일진이 대체 왜 이 모양인 거에요? 네? 네? 네?

***

“거기서 일했었구나. 미영이가 오자고 졸라서 오긴 했지만 널 만날 줄은 몰랐어.”

그날 저녁, 정해진 수순처럼 영우의 연락을 받고 나간 카페에서 그녀의 예전 남자친구는 담대 두 개비를 피운 끝에 그렇게 입을 열었다.

그런 남자의 뻔한 대사에 그녀는 날카로운 어조로 간단히 대꾸했다.

“알았다면 거길 찾아오진 않았겠지. 헤어질 때도 다른 여자 생겨서 그렇다고 말 할 용기도 없던 인간이 무슨 배짱으로.”

오늘 오후 ‘낭트’에서 마주치기 전까지 그녀는 그들의 이별 사유를 다음과 같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공부 할 게 아직 너무 많아서 귀국을 언제 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어. 넌 네 일이 있으니까 날 따라 여기 올 수도 없을 테고 우린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어. 너를 너무 오래 외롭게 한 것 같아 더 이상 기다려 달라고 말 할 염치도 없고 너한테 너무 미안해. 그러니 우리 이만 끝내자.

그녀는 아직도 크리스마스 날 그가 국제전화로 했던 말을 토시 하나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결국 거짓말로 판명 났다. 그들이 헤어진 이유는 ‘그녀의 외로움’도 ‘그의 미안함’도 아니었다. 그와 그녀 사이에 나타난 제 3자. 다른 여자. 정미영! 그녀가 이유였던 것이다! 문득. 그녀는 미영이 의기양양하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인사해. 내 약혼자 민영우 씨. 작년 크리스마스 때 청혼 받았어.’

그러자 가슴 어딘가가 콕콕 쑤시고 아파왔다. 그녀는 목소리가 떨려 나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남자에게 물었다.

“크리스마스 날 청혼했다고?”
“.......”
“나한테 헤어지자고 한 바로 그날이구나. 한 여자랑은 끝내고, 다른 여자랑은 시작하고. 그날 바빴겠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그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나를 이렇게 무시할 수 있어. 적어도 나하고 헤어졌으면 그날 하루는 그냥 넘어가지. 나하고의 이별은 전화 한 통화로 뚝딱 몇 분 만에 끝내고 바로 다른 여자한테 결혼하자고 했단 말이야? 난 너 잊어버리는 데 다섯 달이 걸렸는데, 아니 지금도 널 보면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넌 나 잊어버리는 데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니? 그 하루는 그냥 나 잊어버리는 데 쓰지. 그렇게 해 주지.

“너, 정말 나쁜 놈이야. 그건 너도 알지?”
“알아. 하지만 어차피 정해진 결말이었어. 나 나름대로는 너한테 상처주지 않으려고 머리 굴린 게 그 방법이었다고. 오늘 들통나기 전까지야 너도 자존심 상하지 않고 끝낼 수 있지 않았니?”

이미 본색이 드러났다고 생각한 것인지 나쁜 놈은 너무나 쉽게 자신이 나쁜 놈임을 인정했다. 그 뻔뻔함에 기가 막혀 그녀가 입만 벙긋벙긋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사이, 나쁜 놈은 그제서야 자기가 좀 심했다고 생각해서인지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뜻 모를 소리를 했다.

“너, 예전에 우리가 비다도로 같이 봤던 영화 기억해? 영화는 정말 재미없었지만 주인공 여자가 했던 대사 중에 굉장히 인상 깊었던 게 있었는데?”

네 놈과 본 영화 중에 재미없었던 게 어두 한두 편이었냐? 그녀가 그렇게 쏘아 붙이기 전 영우는 담배 연기처럼 나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마, 최진실이 그 역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그 여자 늘 남자를 만나면서도 어떤 남자하고도 끝까지 가지 못하는 거야. 정말로 자신의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갑자기 자기 심자에서 종소리가 들려온다고.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다. 그렇게 말해주는 그런 종소리가. 여자는 그 종소리가 울리는 상대를 기다렸고, 우린 그때 그것 보면서 그랬었지. ‘정말 웃겨. 그런 사람이 그런 종소리가 어디 있냐’고.”

생각해 보니, 기억이 난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이 사람이 그 사람일 거라고 심장에서 종소리가 들려올 거라는 그 대사를 보고 그때 두 사람은 여주인공을 비웃었었다. 왜냐하면 그때, 그들은 서로를 보고 한 번도 그런 종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 남자는 이제 와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일까. 그런 여자의 소리 없는 질문에 응답이라도 하는 듯이 남자가 말했다.

“난 그때 널 좋아 했었기 때문에 너한테서 그런 소릴 들을 수 없다면 그 소린 애초에 없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어. 하지만, 내가 틀렸지. 정말 있더라고. 그게 종소린지 뭔진 알 수 없지만 보는 순간 가슴에서 ‘이 사람이다.’라는 신호음을 들을 수 있게 하는 그런 사람이.”

그게 종소리인지, 실로폰이 통탕거리는 소리인지, 피아노 건반 소리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어도 영우는 운명의 상대를 만난 순간 정말 심장에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그게 오미영이란 말이야?”

그 잘난 척하는 공주병 환자한테서 소리를 들었다고? 네 심장, 혹시 고장 난 것 아니야? 그렇게 튀어 나오려는 고함소리를 삼킨 채로 하는 그녀의 질문에 이전 애인은 밉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영이도 들었다고 하고. 나한테 중요한 건 그거였다고. 날 보고 심장에서 종소리를 들었다는 여자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내가 너한테 그 소리를 못 들었던 것처럼, 너도 나를 보고 그런 소리는 못 들었어. 그렇지?”

먼저 배신을 때린 주제에 남자는 오히려 추궁하듯이 그녀에게 말했다. 여자는 할 말이 없었다.

-안야. 나도 그런 소리 들었어. 단지 너한테 이야기를 안 했을 뿐이지!

이렇게 똑 소리 나게 대답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정말이지 아쉽게도. 그녀는 거짓말 같은 것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대로 그녀는 운명의 연인을 만날 때 틀린다는 그 종소리를 그에게서 듣지 못했다. 그가 자신에게서 듣지 못했던 것처럼. 그래도 무언가 이대로 끝을 내기엔 억울해서 뭐라고 말을 해 보고는 싶은데,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얼굴로 자신들의 끝을 맺어버리려 하고 있었다.

“너도 언젠가 그 소리를 들을 때가 올 거야. 앞으로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래.”

거기까지. 그 소리를 듣는 순가, 크리스마스 전화 통화 때도 흘리지 않은 눈물이 여자의 눈에서 흘러 나왔다. 창피한 노릇이라는 것은 아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여자의 모습에 남자도 조금은 찔렸던지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와 닿았다. 어깨에 와 닿는 그의 손가락 촉감이 그녀의 마음을 헝클어뜨리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더 매달려 볼까? 내가 미영이보다 더 널 좋아한다고. 일 그만두고 나도 너 따라 미국 갈 수 있다고. 제과점이야 거기가 더 많지 안겠어? 고소공포증 때문에 비행기 타는 게 좀 걸리긴 하지만, 그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이야기를 해 보면...”

그녀의 마음속 생각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그 순간 약간은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나, 아직 너한테 할 말이 남았는데.”
“뭔데?”

그래! 아직 기회는 있는 거야! 역시 이 남자는 여자의 눈물에 약한 사람이야. 저렇게 절절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니, 틀림없이 마음을 고쳐먹은 거야.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의 다음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저기, 미영이는 나랑 너 사이를 몰라. 그리고 꼭 거기서 케이크를 주문하고 싶다고 하거든. 그러니깐... 케이크는 네가 굳이 만들지 않아도 좋지만 그녀한테 우리 사이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어. 너도 알다시피 그 여자, 꽤 섬세한 성격이거든.”

사람이 목소리가 찬물같이 느껴질 수 있다니. 그녀는 그 찬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느낌에 치를 떨었다. 이런 놈이었단 말이냐? 내가 몇 년 동안 ‘사랑’해 왔던 남자가? 1분 정도 짧기도 하고, 엄청 긴 것도 같은 침묵이 흐르고 난 뒤, 그녀는 입 밖으로 튀어 나오려는 욕설을 가까스로 눌러 참은 채 이렇게 대답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어쨌거나 약혼식인데 일부러 그런 소리 해서 기분 나쁘게 할 필욘 없잖아. 걱정 마. 영우씨. 아, 그리고 케이크도 내가 할게. 그래도 우리 몇 년 동안 알고 지낸 사인데 약혼 축하 선물로 내가 영우 씨한테 그 정도도 못해 주겠니?”

예상 밖의 너무나 호의적인 대답에, 남자는 감동어린 표정을 지으며 무의식 중에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역시, 넌 정말 멋진 여자야! 난 네가 이렇게 강한 사람인 줄, 나 없이도 씩씩하게 잘 살아 있을 줄 진작에 알고 있었어. 그러고 보니, 너 얼굴도 아주 좋아졌다.”

그 노골적인 아부성 발언에 그녀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좋아져? 너 때문에 홧술 마시고 장장 12kg이 쪘다! 이 나쁜 놈아!’

정말 이상한 노릇이다. 그녀는 몇 분 전만 해도 눈앞의 이 남자를 ‘사랑’했다. 그런데 단 몇 분 사이. 그 사랑이 사라져 버렸다. 예전에 그녀는 그의 화사한 용모. 그의 명석함, 어떨 때는 유치해 보이기까지 했던 그의 똥고집과 얍삽함까지 매료되어 그를 위해서 라면 그 어떤 희생봉사를 마다하지 않았었다. 방금 전 남자가 내뱉은 “역시 넌 멋진 여자야!”라는 감탄사를 듣기 위해 언제나 노력해 왔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 ‘멋진 여자’ 소리가 지금은 그럴 수 없으리만큼 우습게 들렸다. 자기 편의를 봐주면 멋진 여자라니. 꼭 골빈 여자랑 똑 같은 소리로 들린다.

‘사랑. 이거 참 우스운 거로군. 눈에서 콩깍지가 떨어지니 이렇게 허무할 수가.’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는 남자가 더 미워졌다. 그냥 멋진 왕자님으로 계속 있어 줬다면 계속 아껴주고, 사랑해 줬을 텐데, 아니, 적어도 헤어지는 순간만이라도 멋진 모습을 유지해 줬다면, “너도 좋은 사람 만나길 마래.”까지만 해줬어도 이렇게 기분이 더럽진 않았을 텐데. 자신들의 그 멋진 사랑을 끝에 가서 이런 코미디로 만들어 버리다니. 아아, 열난다. 용서할 수 없다!

속으론 그렇게 이를 간 채로 여자는 얼굴 가득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선량하고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고마워. 약혼식 날 기대해. 내가 아주 눈물이 나올 만큼 감동적인 케이크. 정말 ‘작품’을 한 번 만들어 볼 테니까.”

그래. 먹으면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동적인 케이크. 네 놈이 내 눈에서 뽑아간 정도만큼의 눈물이 네 눈에도 흐르게 만들 그런 케이크를 말이다. 그 순간 그녀는 하늘에 두고 맹세했다.

‘민영우, 이 개 자식! 너 나한테 아주 죽었어!’

***

민영우와 오미영의 운명적인 약혼을 위해 그녀가 만든 케이크는 정말 ‘작품’이었다. 그 케이크가 완성되어 공개되었을 때 처음 본 사람들은 누구나 “와아!”라는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그녀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그 깐깐한 매니저조차 이렇게 말할 정도다.

“굉장한데! 액설런트! 뷰티플 그 자체야! 색깔이 너무 곱다. 대체 크림에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매니저의 말 그대로 3층짜리 그 케이크의 색깔은 참으로 기묘했다. 보통의 약혼 케이크는 눈처럼 하이얀 순백색인데 반해 그것은 은은한 홍조를 띠고 있었다. 야단스런 핑크색도 아니고, 마치 꽃잎이 서서히 붉은 색으로 물든 것 같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은근히 화사한 빛깔이다. 마치 신부의 뺨이 서서히 발갛게 달아오르는 빛깔 같다고나 할까. 그렇다. 그건 마법이었다. 생크림과 밀가루와 계란, 약간의 바닐라 향, 설탕, 그리고...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그 무엇으로 부릴 수 있는 마법.

“나한테만 살짝 말해봐. 뭘 넣으면 이런 색깔이 되는 거야? 응? 응? 응?”
“레시피는 공개하지 않는 거 아시잖아요. 하지만 특별히 매니저님께만은 살짝 가르쳐 드리자면...”

그 순간, 케이크의 화려함에 홀려서 질문 한 사람은 그녀의 눈동자에 언뜻 스친 사악한 미소를 감지하지 못했다. 자기 얼굴에 떠오르는 그 살기어린 미소를 재빨리 감추고 그 대신 해맑은 미소를 배시시 지어 보이며 전 애인의 약혼 케이크를 근사하게 만들어 낸 여자가 말했다.

“먹으면 눈물이 날 만큼 감동적인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지요.”

몹시도 뿌듯하고 반짝반짝 거리는 눈동자. 어쩐지 결투에서 원수를 쓰러뜨린 황야의 무법자, hr은 복수를 완성한 검객 비스무리 한 그런 표정으로.

***

그녀가 만든 그 요사스러운 정도로 아름다운 케이크의 맛이 눈물 나도록 감동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케이크가 아무리 맛있어도 약혼식 케이크를 먹고 눈물을 흘리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케이크를 먹은 사람들이 백이면 백, 전부가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약혼 드레스와 비슷한 그 은은한 연분홍색 케이크의 아름다움에 혹해서 한 입 가득 그 케이크를 베어 물었던 신부도, 신부 옆에서 자신이 차버린 멋진 여자가 만들어준 케이크를 싱글벙글한 얼굴로 같이 베어 물던 신랑도, 자식들이 어울리는 제 짝을 찾았다며 기뻐하던 그들의 부모와 일가친척, 친구들 모두 그 아름다운 빵 조각을 입에 넣고 한 입 씹는 순간 모두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 했다.

왜? 누구라도 전국에서 가장 맵기로 소문난 청량고춧가루가 듬뿍 든 생크림 케이크를 한 입 가득 입에 넣게 되면 울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날 오후, 입에 게거품을 물고 제과점에 쫓아 온 신부 어머니의 항의에 사건의 진상을 알아버린 매니저의 고함소리가 매장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고춧가루! 고춧가루라고? 약혼 케이크에 고춧가루를 넣어? 레시피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 어쩌구 하더니, 감히 그런 몰지각한 짓을! 당신, 제 정신이야?”

대한민국에서 스물 아홉 먹은 여자가 자신을 배신한 나쁜 놈에게 응징을 가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케이크를 만들어 파는 입장에서 손님의 케이크에 고춧가루를 넣는 짓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중죄였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그 벌로 그녀는 그날 직장인으로선 최대의 시련인 ‘해고’를 당하고 말았다.

스물 아홉이 되기 전까지 그녀는 남들이 말하는 아홉수.-‘여자는 9자가 들어간 나이를 넘기기 참 어렵다’라는 소리를 별 재수 없는 낭설로 치부해 왔다. 하지만 사귀던 놈이 고교동창과 눈이 맞아 배신을 때리고, 맞선상대로 폭탄을 만나고, 별책부록으로 사이코 같은 놈에게 상반신 누드를 공개하는 수모까지 겪었다!- 거기에 실직까지 당하고 보니, 새삼 그 아홉수라는 것이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하여, 백수로 지낸 며칠 후, 여자는 이 한 해를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것인가 심사숙고 한 끝에 다음과 같은 새해 목표를 뒤늦게 짜내기 시작했다.

올해 반드시 지켜야 할 목표!

1. 백마 탄 왕자까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올 크리스마스까진 민영우 그 자식에게 구격시켜도 꿀리지 않을 늑대 한마리는 꼭 장만하자!
2. 그러기 위해서 기필코 체중을 원래대로 12kg 감량한다!
3. 화가 나거나 기분이 나쁠 때 먹고 마시는 것으로 푸는 습관은 꼭,꼭,꼭 고치자! 오늘부로 금주! 아이스크림, 초콜릿, 떡볶이, 순대와 작별을 고하자. 그들을 사랑하긴 하지만 난 내 몸을 더 사랑해야 하니깐.
4. 구직활동에 힘써 하루바삐 백수생활에서 탈출하자!
5. 현대인의 필수품인 운전면허증을 딴다!. 마이카 족이 되어 나도 더 이상 기계에 겁내지 않는다는 인상을 보이자. 그리고 운전하는 마이카 족에게 남자가 더 꼬일 확률이 압도적으로 많다!
6. 신물을 집어 들자마자 오늘의 운세부터 보는 습관을 고치자. 내 운명은 내가 만든다!
7. .........

새해 지켜야 할 목표를 종이 위에 열심히 적던 여자의 손길이 숫자 7 뒤에 딱 멈추어 졌다. 분명히 일곱 개쯤 생각해 두고 있었는데, 아주 중요한 것이었는데, 그게 뭐더라?

“아이, 방금 전까지 기억하고 있었는데 참! 나도 벌써 치매인가?”

그렇게 자기 이마를 톡톡 건드리며 생각에 생각을 골몰하던 그녀의 어깨 너머에서 다음과 같은 우렁찬 고함소리가 들린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삼순아! 김삼순! 나와서 밥상 좀 봐라!”

자신을 부르는 엄마의 찢어지는 목소리에 그 순간 ‘김삼순’이라 불리는 그 여인은 자신의 일곱번째, 마지막 새해 목표를 기억해 냈다. 아니, 이건 마지막 목표가 될 수 없다. 제일 위에 쓰고 다른 항목들을 밑으로 한 칸씩 내려야 해.

“기임~ 사암~ 수우우운!!”
“나가요!”

자식이 자그마치 넷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꼭 무언가 부려먹을 때는 셋째 딸을 찾는 엄마의 고함소리에 앙칼지게 대꾸하면서 여자는 자신의 다이어리에 이렇게 썼다.

“김삼순! 올해야 말로 개명신청에 성공해 이름을 김희진으로 바꾼다!”

***

“승! 어림 반 푼어치 없는 소리 하지도 마. 이 것아!”

셋째 딸의 올해 목표를 전해들은 엄마의 첫 감상은 그것이었다. 자신의 장밋빛 꿈에 그렇게 인정 사정없이 초를 치는 모친에게 삼순은 이마를 잔뜩 구긴 채 물었다.

“대체 왜 안 된다는 거야?”
“한 번만 더 말하면 1000번째다. 이 것아! 네 이름을 누가 지었니? 할아버지께서 지으신 이름을 어떻게 네 마음대로 바꾼다는 거야?”
“나도 한 번만 더 말하면 1000번쨰유, 엄마! 이건 엄마도 책임을 져야 해! 내가 엄마 셋째 딸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어? 왜 나만 이런 후진 이름이냐구, 대체! 김삼순이 뭐야? 김삼순이!”
“저, 저, 저것이 말하는 것 좀 보게!”

오늘따라 강하게 나오는 딸의 반발에 엄마는 이마를 잔뜩 구긴 채 밥주걱을 들고 있던 오른 손을 치켜 드신다. 마치 한마디만 더 잘못하면 그 밥주걱으로 한 대 후려치실 것처럼. 평소에는 그 정도의 협박이면 알아서 기는 삼순이었다. 그런데 오늘만은 달랐다. 물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엄마에게서 세 걸음 정도 물러서긴 했지만 그래도 고개를 꼿꼿이 치켜들고 하고 싶은 말을 계속 했다.

“그렇잖아? 내 이름이 삼순이면 언니들이나 동생도 일순, 이순, 삼순으로 지어야지! 왜 큰언니는 일영이고 둘째 언니는 이영이고 막내는 그나마 아들이랍시고 숫자도 안 달고 멋지구리하게 정재라고 붙여놓고, 왜! 왜 나만 삼순이야?”

그 움직일 수 없는 증거에 엄마는 약간 찔끔하신 표정으로 셋째 딸을 쳐다보셨다. 그렇게 조금은 누그러진 엄마의 표정에 용기를 얻어 삼순은 목소리의 톤을 더 한층 높였다.

“엄마가 그랬지? 행동 잽싸게 해서 올해 가기 전에 시집가라고? 근데 맞선 나가면 만나는 남자마다 내 이름 듣고 비실비실 웃어대더라! 대체 왜 나한테만 이래? 나만 어디서 주워왔어? 그런 거야? 그런 거냐고!”

김삼순이라는 이름을 달고 산 이 29년 동안 그런 일은 늘상 있어왔던 것이다. 그녀가 “김삼순입니다.”라고 자기 소개를 하면 열 중 여섯은 ‘풋!’하고 웃어 버린다. 나머지 넷은 웃음을 참으려고 노력하고. 30년 가까이 겪었던 일이니까 1년의 대부분은 체념하고 살았다. 하지만 1년 중에 한 달 정도 이 이름이 정말정말 싫을 때가 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무래도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은 다 이 재수없고 흉측한 이름 대문인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을 그녀는 몸서리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 내 이름은 김삼순이 아니라 김희진 정도 되었으면 그래도 영우 그 인간이 날 그렇게 우습게 여기고 차 버렸을까?
- 맞선에 나왔던 그 폭탄이 대놓고 날 그렇게 무시 할 수 있었을까?

아니, 아니다. 절대로 아니야! 그러니까 이름을 바꿔야 해! 난 더 이상 세상에서 삼순이 취급 받기도 지쳤다고!

그런데 너무 흥분한 나머지 넘지 말아야 할 수위를 넘은 모양이었다. 조금 전까진 얼굴에 그래도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짓고 계시던 엄마도 “나만 어디서 주워왔어?” 라는 딸의 앙칼진 목소리에 응징을 가하기 시작하셨다.

따악!!
마징가 Z의 로켓 주먹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충분한 위력을 갖고 있는 엄마의 손바닥이 삼순의 머리통을 매섭게 후려 치셨다.

“이것이 찢어진 입이라고 하면 다 말인 줄 아니? 야! 그러기 누가 너보고 고추 안 달고 나오래?”

고추가 없기는 그녀의 세 딸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유독 삼순만은 그기에 사연이 있었다. 손이 귀한 집안, 김씨 집안 장남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죄로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하는 운명에 봉착한 어머니로선 딸 둘을 연이어 낳고 세 번째 아기가 뱃속에 들어섰을 때 그야말로 기도하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삼순이 너 가질 때 꿈에 감에, 복숭아에, 고추에, 씽 있는 과일이란 과일은 다 보이더라. 아들도 그냥 아들이 아니고 쌍둥이를 낳을 꿈이라고 너의 할머니는 좋아하시니, 다니는 점 집마다 다 아들이라지, 나중에 배불렀을 때 그 배 모양도 틀림없이, 꼭, 절대로 아들이랬는데 낳아놓고 보니까 있어야 할 게 없는 거야! 이 것아! 그때는 나도 꼭 너한테 사기 당한 기분이었다고!”
“사기? 내가 뱃속에서 ‘나, 아들이에요!’라고 뻥친 적 있어? 뻥 친 건 점쟁이들이지 내가 아니라구!”

삼순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둘째 손녀딸 까지는 “괜찮다. 아가. 다음에는 틀림없이 아들일 게야.”라던 할머니도 그때만은 엄마에게 미역국을 끓여주시지 않았다고 한다. 사흘 동안 두문불출하시던 할아버지가 나흘째 내던지시다시피 내려주신 이름이 바로 ‘삼순’이었다.

“원래는 ‘삼녀’, 아니면 ‘끝순이’라고 지으시려다가 할머니가 말리셔서 ‘삼순’이라고 바꾸셨다더라. 그러니 이만한 것도 고맙게 생각해!”

‘헉! 사, 삼녀? 끝순이?”

귓가에 들려오는 그 소리에 그 순간 삼순의 등짝에선 파르르 소름이 돋았다. 삼순도 끔찍하지만 삼녀라 끝순이는 끔찍의 단계를 넘어서 공포다. 하지만 삼녀 대신 지어진 삼순이란 이름도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였기에 엄마 말대로 고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방금 전 보다 기세가 한풀 꺾인 딸에게 엄마는 밥주걱을 내밀며 사나운 기세로 이렇게 소리치셨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고 아, 밥이나 퍼! 김.삼.순!”

***

“그러게 매년 씨도 안 먹히는 소릴 왜 해?”

한 방을 쓰는 언니 이영의 질문에 오이를 붙이던 삼순의 손길이 딱 멈추어지고 무슨 그런 질문이 다 있느냐는 어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언니는 김삼순이란 이름으로 운명적인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 왕자까진 아니더라도 괜찮은 놈 하나 낚으려면 김삼순보단 괜찮은 이름이 필요해!”

적어도 듣고 웃지 않을 수 있는 이름이 필요하다.

아들을 낳은 지금까지도 엄마는 그녀가 아들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을 삼순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딸에게 그 어머니의 아쉬움은 어처구니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비록 ‘삼순’이라 불리는 한이 있어도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 아직 내가 사랑해야 할 꽃미남이 얼마나 많은데, 난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게 정말로 행복해.”
“그래, 그래, 어련하시겠수. 부디 근시일 내로 수원 성취해서 늑대 목도리 한 벌 장만하구랴.”

문득 삼순의 시선이 그렇게 말하는 언니 이영에게로 향했다. 어두은 스탠드 불빛 아래 비춰진 언니의 얼굴은 언제나 그랬듯이 참 예쁘다. 삼순은 이 바로 위 언니를 좋아했지만 그녀를 볼 때마다 조금은 불곤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똑 같은 원료, 똑 같은 엄마 아빠 아래서 나온 결과물이 저렇게 다를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난 삼순인데 어째서 내 언니는 이순이 아닌 이영이란 말인가.

동생의 얼굴에 드러나 그 소리 없는 질문을 알아 본 이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쩌겠어. 내가 나올 때는 그나마 할아버지께서 손녀딸 이름을 가지고 화풀이 하실 정도는 아니셨다는데.”

삼순 자신도 이미 골백번은 더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가끔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아아, 우울하다. 그게 오늘부터 결심한 다이어트 때문에 배가 고파서 그런 건지, 아니면 어쩐지 올해도 이름 바꾸기가 글른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 때문인지, 며칠 동안 발을 동동 구르고 뛰어 다녀도 발견되지 않는 일자리 때문인지 삼순은 알 수가 없었다. 왜 평소처럼 순대나 떡볶이를 주지 않느냐고 뱃속에선 꼬르륵 신호를 보내오고 있다. 그 때, 배고픔에 지친 삼순의 손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포착한 이영이 소리 쳤다.

“삼순이 너! 다이어트 때는 저녁 여섯시 이후론 물도 마시면 안된다는 것 몰라? 그 오이조각이 내일 볼 살로 둔갑하면 어쩌려구!”

언니의 날카로운 지적에 얼굴에 붙어 있던 오이를 떼어 먹으려던 삼순의 손길은 딱 멈추어졌다. 그녀의 입술에선 그 순간 신음 같은 한숨 소리가 흘러 나왔다. 참으로 불공평한 것이 살을 찌는 것은 한 순간인데 빼는 건 무지 힘이 든다는 것이다. 요새는 다이어트와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에베레스트 산꼭대기에 올라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문득 절망에 빠진 그녀의 시야에 조카 지유가 틀어놓은 만화영화 화면이 슬쩍 비춰진 것은.

화면 속 아랍 청년 알라딘이 램프를 닦고 “지니, 내 소원을 들어줘.”라고 주문을 외우자 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타나 청년의 소원을 들어준다.

“......나한테도 지니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갑자기 뜬금 없는 동생의 중얼거림에 이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뭐?”
“말 그대로, 일자리가 필요하다면 일자리도 구해주고, 옆에 있어줄 좋은 사람이 필요하다면 좋은 사람도 구해주고, 이름 바꾸고 싶다고 하면 무서운 우리 엄마 몰래 내 이 요상한 이름도 바꿔주고... 그런 지니 같은 요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린 조카 앞에서 하기에는 자존심 상할 정도로 약한 소리였지만 삼순은 정말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셋째 딸에게까지 대학공부는 시켜줄 수 없다고 선언한 부모님께 가슴을 탕탕 치며 “그럼 내가 벌어서 가면 되지!”라고 씩씩하게 대꾸하던 그녀였다. 씩씩하게 알바를 뛰고, 그 돈으로 제빵 공부를 하고, 든든한 직장을 획득하고, 근사한 애인도 만들었었다.

김삼순. 그 이름은 김씨 집안에선 의지의 한국인으로 통한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 그녀에게 지니는 필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필요하다. 아니, 필요하다고 생각 할 만큼 지쳐있다.

그렇게 얼굴에 오이를 붙인 채 풀이 죽어 보이는 막내 이모에게 일곱살배기 조카 지유가 무슨 생각에선지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니? 지유가 이모한테 주는 거야?”

수줍은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꼬마가 내민 것은 그 나이 또래 사내아이들이 잘 가지고 노는 동그란 종이 딱지였다. 따지 안에는 지금까지 그 꼬마가 보고 있던 만화영화 속 지니 ?푸르딩딩한 피부에 상당히 능글맞게 생긴 거인-가 씨익 웃고 있다.

“응. 이거 지니, 그러니까 쌈순이 이모 가져.”

비록 그녀가 듣기 질색하는 ‘쌈순이 이모’라는 호칭으로 부를망정, 그 순간 삼순의 눈에 그 꼬마는 날개만 없다 할 뿐이지 천사로 보였다. 그래, 세상에 눈앞의 이 녀석을 뺀 그 어떤 남정네가 나를 이렇게 생각해 주랴? 그래서 여자는 으스러져라 꼬마를 끌어안고 볼을 부비며 그 감격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고마워. 지유야! 내일 우리 지유 생일 때 이모가 아주 근사한 케이크 만들어 줄게! 역시 나한테 너밖에 없어!”

스물 아홉 살짜리 여자는 일곱 살 짜리 남자의 애정공세에 몹시도 감동했다. 하지만 그 보다 훨씬 상식적인 서른 살 여인은 그녀의 감격을 두고 보아 줄 없었다. 딱 30초 동안 시니컬 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 보던 이영이 입을 열었다.

“지금, 너한테 원하는 직장과 남자를 가져다 줄 건 그 시퍼러딩딩하고 능글맞은 디즈니표 요정 ‘지니’가 아니라 다이어트와 이력서야! 그러니까 김삼순! 이 틈을 타서 스리슬쩍 얼굴에 붙은 오이 떼먹으려는 생각은 버리고 빨랑 자! 내일은 면접에 운전교습에 바쁘다며? 애 데리고 언제까지 황당한 소리만 늘어놓을 거야?”

바,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

“그런 황당한 일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그것은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조용한, 서슬퍼런 목소리에 그 만자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고개는 점점 아래로 수그려지고 있는 판이었다. 저 남자의 목소리가 조용해 질수록, 그와 반비례해서 그 목소리의 주인이 얼마나 무시무시해 지는지 다년간의 경험으로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데려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파리에서 비싼 돈 주고 스카우트 해 온 파티쉐가 그만 둡니까? 대체 사람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당신들, 우리 하루 매상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하는 소리요?”

조용하지만 불을 내뿜는 자기네 두목의 목소리에 보고를 하고 있던 남자는 순간적으로 이렇게 맞쏘아 붙이고 싶었다.

‘파티쉐가 갑자기 뇌졸증으로 쓰러질 줄 그 누가 알았겠냐고요. 이런 돌발사태까지 제가 어떻게 책임을 진답니까? 사람 관리랑 뇌졸증은 별개의 문제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눈앞의 젊은 남자에게서 월급을 받아 먹고 사는 처지였다. 몹시도 치사하지만 그에겐 어미 새가 새끼 새에게 먹이를 조달하듯 월급을 조달해 먹여 살려야 할 처자식이 있었다. 그래서 남자, 레스토랑 ‘리베라’의 총지배인 김춘식은 튀어나오려는 그 소리를 억지로 눌러 삼키고 사장 장도영에게 침착한 목소리로 보고를 계속 했다.

“이런 일이 생겨 심히 유감입니다만 사장님, 파티쉐인 앙리 멜보트 씨가 지난 밤 자정에 뇌졸증으로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지금 한강 한 병원 응급실에 후송했다가 입원실로 옮겼다는 보고만 들어와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보고를 듣고 있던 장도영의 눈썹이 불쾌함으로 찌푸려져 가고 있었다.그는 서론이 긴 것은 딱 질색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지배인은 그가 알고 싶어 하는 단 한가지를 말해주기 전에 너무나 긴 서론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우리가 불란서에서까지 공수해 왔던 그 대단한 파티쉐는 작업장에 복귀를 할 수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인정머리 없는 인간! 사람이 쓰러졌다는데, 어떻게 한다는 소리가!

그러나 튀어나오려는 그 소리를 다시 눌러 삼키며 지배인은 대답했다.

“몸의 오른쪽 전부에 마비가 왔다니까 복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제길.”

고개를 떨군 지배인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도영의 입에선 순간적으로 그의 위치에선 해서는 안되는 욧설이 흘러 나왔다. 이런 제기랄,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나 그래. 예술급 디저트로 소문난 것이 그의 레스토랑 이었다. 물론 요기도 “어떻게 프랑스에서 이다지도 먼 이곳에서 이렇게 제대로 된 프랑스 요리가 나오는 거지?”라는 찬사가 나올 만큼 대단했지만 그 중에서도 디저트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런데 그 위대하신 피티쉐께서 쓰러져 누워버리셨단다! 이런 제기랄! 염병할! 빌어먹을!

거기까지 속으로 오만가지 욕설을 퍼붓던 남자는 곧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부하직원들의 시선을 눈치채고 곧바로 표정관리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속삭였다.

‘장도영, 아서라. 그만. 애들이 보고 있지 않니?’

“됐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할 수 없겠지요. 당장 후임자를 물색해 보십시오. 사흘 드리겠습니다. 그 사흘 안에 어떻게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사람을 구하세요. 알아 들었습니까?”

물론 지배인은 사장의 지시를 알아듣긴 했다. 한국 사람이므로 한국말을 알아 듣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알아 들은 것과 알아 들은 대로 실천을 한다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사, 사흘...... 안에요?”

지배인은 제발 눈앞의 젊은 사장이 농담을 하는 것이길 바랐다. 하지만 그가 알고 사장이 알듯이 눈앞의 청년은 일하는 도중에는 농담이라는 것을 모르는 족속이다.

“그래요. 사흘! 왜요? 너무 많습니까?”

그의 말은, 적어도 이 리베라 안에서는 법이었다. 법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지배인은 어쩔 수 없이 다시 튀어 나오려는 “이 개 자식!” 소리를 눌러 삼킨 채, 정중히 고개 숙이며 대답했다.

“노력하겠습니다.”

만족스럽지 못한 지배인의 대답에 사장의 숱 많은 눈썹이 다시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는 지배인이 두려워하던 불벼락은 내리지 않았다. 단지...

“노력만 가지곤 곤란합니다. 지배인님, 난 돈을 버는 일을 아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일에 도움이 안 되는 무능력자는 아주 싫어합니다. 사흘이요. 그 안에 사람을 못 구하신다면 가슴 아픈 일이지만 새로운 파티쉐워 더불어 새로운 지배인도 구해 볼 생각입니다.”

나긋나긋한지만 지배인이 듣기에 소름이 끼치는 섬뜩한 목소리로 그렇게 협박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쐬기를 박기 위해 “알아들었습니까?” 라고 말하기 직전, 사장의 휴대폰이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사실 도영은 지금 전화를 받을 기분이 아니었으나, 그의 휴대폰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바꿔 말하면 이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는 그가 꼭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네, 장도영입니다. 아, 어머니! 네. 네. 네? 도진이를 찾았어요? 어디서요?”

지배인이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보건데 전화를 건 사람은 저 무서운 사장의 어머니인 모양이다. 딱 때맞추어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준 그 분께 고마움을 느끼면서 지배인은 그만 물러가라는 사장의 표정에 반색을 하며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대체 72시간 안에 사람을 구하라니. 그것도 앞에 ‘특’자 붙은 파티쉐를 이, 이걸 어쩌지? 지배인은 지금부터 하루가 24시간이 아닌 48시간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

‘나는 바쁜 사람이라구. 하루는 왜 딱 24시간밖에 되지 않는 거야?’

별 다섯 개까지 레스토랑 세 군데를 운영하는 데도 시간은 늘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도영이었다. 비싼 돈을 들여 고용한 파티쉐는 쓰러져서 일을 못한다지. 말로는 지배인에게 사흘 안에 구하라고 큰소리 땅땅 쳤지만 그 자신도 지금부터 바쁘게 사람을 구해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도영은 알고 있었다. 또 철마다 바꾸는 인테리어며, 그것 말고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이 쌓여 있는데 그렇게 바쁜 시간을 쪼개서 제멋대로 학교를 휴학하고 가출한 동생 놈까지 잡으러 가야 하다니. 화가 불끈불끈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자니, “어머니, 저 지금 무척 바쁜데요. 웬만하면 김비서를 시키시죠?”라는 말은 차마 나와주지 않았다. 그 자신 여칠 전 본 맞선에서 맞선녀를 꽤 무식한 방법으로 쫓아 낸 뒤였기에 지금 어머니께 알아서 기어야 하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내 긴 말은 않겠다! 도진이 녀석하고 저녁시간까진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집에 들르거라.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알고 있겠지?’

당연히도 그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고 있었다. 아들의 짧고도 어색한 침묵에 수회기 너머 모친의 목소리는 급격히 높아졌다.

“아이고! 내 팔자야! 아들이라고 둘만 남은 게 하나같이 변변치 못해서는! 큰 놈은 엉뚱한 일에 미쳐 장가도 안가지, 부모도 없는 저희 조카 생일도 잊어버리고, 작은 놈도 걸핏하면 사고만 치니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그리 지어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그래도 두었다간 끝도 없을 것만 같은 어머니의 하소연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도영은 저녁 6시까지 동생 도진을 찾아 함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아, 그리고 오늘로 일곱 살이 되는 조카를 위해 큰 삼촌으로서 근사한 케이크를 사올 것. 그래서 그는 꽤 이름 난 제과점에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케이크를 산 후, 재빨리 동생이 있다고 어머니가 제보한 그 곳으로 출동했던 것이다.

“장도진 강사요 지금 막 도로연수 나갔는데요?”

어머니가 제보해 주신 정보를 듣고 그가 찾아간 운전학원 사무실 여직원의 말에 도영은 안도와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수집된 정보대로 그의 사냥감은 이곳에 있다. 하지만 사무실 한쪽 벽에 붙여 넣은 운전 강사들 사진틀에 끼어 있는 동생 놈의 얼빵한 얼굴. 가출한 주제에 너무도 무사태평해 보이는 그 얼굴을 보자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내 이놈을 그냥! 어디 이번에 잡기만 해 봐라! 아예 사지를 꽁꽁 묶어서 아프리카 쪽 대학에 보내버릴 테다!’

그렇게 이를 갈며 동생이 나갔다는 방향으로 향해 달리던 그때였다. 그의 차 뒤쪽으로 “쾅!”소리와 함께 무언가 둔탁한 충격이 느껴진 것은. 운전학원 특유의 노란색 자동차가 자신의 승용차 뒤꽁무니를 들이 박았다는 사실을 도영이 깨닫기까지는 3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런! 빌어먹을!”

***

“이, 이런 빌어먹을!”

브레이크를 밟는 다는 것이 액셀을 밟아서, 본의 아니게 남의 차를 박아버린 초보운전, 아니 뭄년허 운전 김삼순의 입에서 나온 소리도 그것이었다.

“거기서 액셀을 밟으면 어떻게 해요! 누나! 앞 차하고는 늘 그 앞차 타이어가 보일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라고 내가 100번은 넘게 말했잖아요!”

자기 옆에 앉아 있던 애송이 운전강사의 목소리가 삼순에겐 그저 멍멍하게 들려왔다.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뛴다.

으아, 으아! 나, 이거 괜한 짓 시작한 것 아닐까? 마이카 족이 되면 좀 괜찮은 여자로 보이지 않을까 싶어 기계치라는 치명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운전학원에 다닌 것이 이제는 후회가 된다. 7전8기라고 기능시험은 일곱 번 떨어지고, 여덟 번 만에 가까스로 붙었다. 겨우겨우 도로주행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아뿔사! 면허증도 따기 전에 사고부터 쳤다. 이 일을 우째? 생애 최초로 자신이 저지를 교통사고에 그녀가 돌덩이처럼 굳어있는 사이, 재수 없이 뒷차에 받쳐버린 피해자가 “쾅!”소리가 나게 차 문을 닫고 그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 문짝 때려 부수는 소리로 미루어 보건대 피해자는 지금 기분이 몹시도 안 좋은 모양이다. 히이익!!

“...나와!”

핸들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그녀의 귓가에 들린 것은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서슬퍼런 남자의 목소리였다. 지옥의 대마왕 목소리가 저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여자의 고개는 더더욱 수그러졌다. 그러자, 남자가 손바닥으로 차 뚜껑을 잇는 힘껏 내리쳤는지 위에서 다시 “쾅!”소리가 흘러 나왔다.

“당장 나와! 야! 너 귀 먹었어? 나오라는 소리 안들려? 빨리 나와!”

그 순간, 남자의 노골적인 명령조에 고개를 팍 숙이고 있던 삼순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봐요!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야라니? 댁이 날 언제 봤다고...”

삼순이 자신의 말을 끝맺기도 전, 그 성질 드런 남자가 먼저 차 문을 확 열어 제꼈다. 단, 그녀 쪽이 아닌 그녀가 앉아 있던 곳에서 반대쪽을. 남자는 삼순이 두 눈을 둥그랗게 뜨고 지켜보는 앞에서 그녀와 동승하고 있던 애송이 운전강사를 무시무시한 완력으로 끌어내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강사의 턱에 주먹을 꽂았다.

퍽!
남자의 주먹에 강사총각은 한마디 비명도 없이 나가 떨어졌다. 하지만 나자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무표정한, 그렇지만 충분히 험악한 얼굴로 계속해서 주먹을 날렸다. 몹시 흉폭한 그 남자는 사람을 두들겨 팬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너, 얌전히 있으라고 내가 미리 경고했지? 두 번 다시 허튼 짓 하면 팔하고 다리 몽둥이 부러뜨려 버리겠다고 했어, 안 했어?”
“했어. 으아아아아악! 하, 하지만 팔은 안 돼에! 그, 그만해, 제발!”

잠시 후,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부들거리며 지켜보던 여자의 입에서 이런 사태를 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나올 그 무언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비명 말이다.

“깨아아아악! 꺄아아아악! 사람 살려어어! 누구, 아무도 없어요? 경찰, 경찰 좀 불러줘요!”

시민의 지팡이인 경찰이 삼순의 부르심을 받고 달려온 것은 그로부터 60초 후의 일이었다.

***

“흠, 대한민국 경찰은 동생을 때렸다고 전부 체포를 하진 않습니다. 뭐, 피해자 쪽에서 처벌을 원하시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겠지만서도.”

그렇게 심드렁한 얼굴로 “어쩔거요? 진단서 끊어서 고소할 겁니까?”라고 물어보는 경찰에게 도진은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형의 돌주먹에 맞아 이빨이 흔들거릴 지언정, 형님을 고소하겠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피해자의 의사에 따라 할 일이 없어진 경찰은 궁시렁거리며 세 사람 ?주먹질 한 남자와 주먹질 당한 남자, 그 광경을 보고 비명을 지른 여자-에게 이만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폭력범으로 고소당할 뻔 하다가 동생의 선처로 유치장 행을 면한 남자의 시선이 싸늘하게 여자 쪽을 향했다. 눈빛남으로도 사람 뺨을 이다지도 따끔하게 만들 수 있다니, 그 시선의 공력이 꽤 엄청난 남자라고 삼순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도 할 말은 있었다.

“내 눈앞에서 다짜고차 그렇게 무식하게 사람을 패는데 소리 안 지를 여자가 어디 있어요? 댁 이마에 강사 선생님 친형이라고 쓰여 있는것도 아닌데.”

이 어색하기 그지없는 순간에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삼순은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불쾌해 하던 시선이 경멸조로 바뀌었다.

“원래 그렇게 천지분간 못하고 오지랖이 넓습니까?”

이거 욕 맞지? 분명히 욕 같은데, 차분한 음성으로 그렇게 물으니 어째 그렇게 들리지 않는다. 음, 미남의 위력이란 대단한 것이로구나. 안경 쓴 남자가 이렇게 샤프해 보이기도 처음...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처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분명히 요 얼마 전, 안경 쓴 멋진 남자를 보았었는데. 비록 멋지게 생긴 것만큼이나 사이코였지만. 그러고 보니 이 얼굴 낯이 익은데? 삼순은 마른 침을 삼키며 그 남자의 얼굴을 슬그머니 살폈다. 어마니나니나. 그 사이코다! 사이코 주제에 그녀의 반 누드를 보고는 “당신 변태 아니야?” 라고 물었던. 제기랄, 여기서 또 마주치게 될 줄이야.

김삼순에게는 일종의 징크스가 있었다. 불쾌하게 시작한 사람과의 관계는 내내 껄끄러워지고 그 껄끄러운 사람과는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오미영이 아니던가. 뭐 지금 이 남자하고의 일을 관계라고까지 칭할 것은 없지만 어쨌든 요샌 모든 것이 불길한 아홉수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그래서 여자는 그가 자신이 그 ‘화장실의 변태녀’인 것을 알아보기 전에 재빨리 몸을 돌려 파출소를 벗어나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남자가 그녀를 불러 세운다.

“이봐요.”
“네, 네?”

이 남자, 혹시 날 알아봤나? 그러나 다음 목소리를 들어보니 그건 아닌가 보다. 남자는 그 잘생긴 입술에 비웃음을 잔뜩 머금은 채로 그녀에게 단지 이렇게만 말했다.

“댁은 면허를 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고작 연수 나온 정도로 벌써 남의 차를 박는 것을 보면. 연락처나 남겨요. 차 견적이 꽤나 나올 것 같으니까.”

그 인정머리 없는 목소리에 그녀는 이를 악문다. 제기랄. 내가 어제 무슨 꿈을 꾸었더라.

그녀는 속으로 이를 박박 갈면서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김삼순 씨?”

삼순은 언제나 남에게서 불려지는 자기 이름을 안 좋아 하지만, 그 중에서 이럴 때가 제일 싫다. 싫은 인간이 비뚤어진 입술로 자신의 촌스런 이름을 길게 끌어 발음 할 때. 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이름 따위엔 관심이 없다는 듯, 1초 만에 삼순의 명함을 양복 호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의 낮은 중얼거림의 그녀의 귓속을 꿰뚫었다.

“하여간. 대체 한 해에 새로 나오는 살인면허가 얼마나 되는 거야? 제기랄. 재수가 없으려니까.”

아무리 미남이라도, 자신의 애인도 아닌 미남의 저 고약한 입버릇을 그녀가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당신, 말 다했어요? 정말 예의도 없으시군요!”

화가 치밀어서 전 애인의 약혼식 케이크에 고춧가루를 뿌릴 때를 제외하곤 비교적 큰소리 안 내는 편인 김삼순으로선 남자에게 이렇게 쏘아 붙이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비록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폼이 남자와의 말싸움에는 익숙하지 않은 티가 역력했지만 그녀로선 장족의 발전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남자의 대답은 가차 없었다.

“새로 뽑은 지 3일 밖에 안 된 차를 저 지경으로 만들면 누구라도 이정도의 욕은 듣기 마련이요. 그게 싫으면 운전을 제대로 하면 될 일이지?”

그녀는 남자에게 말발에서 밀리고, 눈싸움에서 밀리고, 기싸움에서도 밀리고 있다. 아홉수.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여자는 다시 문 밖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남자가 아닌 그 남자의 동생이 그녀를 부른다.

“저기, 누나!”
“왜, 또!”

악을 쓰며 돌아보는 그녀에게 도진은 잠자코 한쪽 구석 테이블에 놓여 있는 상자를 가리킨다. 크기와 모양이 비슷한 케이크 상자 두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하나는 아마도 그 남자의 것인 모양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가 조카 지유를 위해 마련한 것으로 연수가 끝나는 대로 들고 집으로 가져가기로 한 것이었다.

“조카 생일상에 가져갈 거라면서요.”

남자아이의 지적에 그녀는 머쓱한 얼굴이 되어 재빨리 상자 중 하나를 들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나오면서 그녀는 다시 중얼거렸다. 역시나 이놈의 징크스는 백발백중이다. 거기다가 아홉수. 백수인 주제에 저 비싼 자가용 수리비까지 물어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문득 자신이 버텨내야만 하는 올 한 해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삼순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서라. 김삼순. 고작 이런 일로 인생을 비판하진 말자. 그래도 설마 여기서 더 무슨 일이 생기겠어? 어차피 저 인간도 또 볼일은 없을걸.’

제발 그렇게 되기를 그녀는 바라 마지 않았다.


3. 전화위복

‘제발 오늘은 무사평안하게 끝나야 할 텐데.’

동생 놈을 끌고 부모님이 계시는 본가에 오랜만에 들어서면서 도영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루동안 나쁜 일 두 가지에 좋은 일 두 가지면 그래도 썩 나쁜 편은 아니었다. 비록, 비싸게 고용한 파티쉐는 쓰러지고 뽑은 지 사흘 된 차는 웬 이상한 여자 때문에 찌그러졌지만, 그는 갑자기 닥쳐오는 돌발 상황에는 비교적 익슥한 사람이었다. 도망갔던 동생 놈도 잡았고, 그 놈과 함께 사랑스런 조카의 생일 파티에 늦지 않게 되었으니 그게 어디인가. 하지만 그 역시 집안으로 들어가기가 상당히 껄끄러웠다. 가출 했다가 자신에게 붙잡혀 집에 들어가는 동생만큼이나.

“어머나! 작은 도련님도 오셨네! 사모님! 사모님! 나와보세요! 도련님들 오셨어요!”

집안 일 봐주시는 충주댁 아주머니의 사모님, 즉 자신들의 어머니 윤여사의 얼굴을 보면서 그녀의 두 아들은 내심 마른 침을 삼켰다. 드디어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손주의 생일 날이라고 곱게 물빛 저고리에 곤색 치맛자락 차림을 하신 윤여사가 특유의 매서운 눈빛으로 큰아들에게 묻는다.

“재주도 좋다. 도진이 이 놈을 어디서 잡아온 게야?”
“어머니 명령이시면 없는 재주라도 부려야죠. 아직 서울 근처에 있어서 찾긴 쉬웠어요.”

사진이 사냥해 온 사냥감을 여왕님께 바치며 도영은 반듯한 착한 아들의 미소를 지었다. 아들의 미소에 어머니도 마주 웃으신다. 그 미소에 도진이 막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직전, 어머니의 얼굴에서 나이보다 어여쁘신 그 미소가 확 꺼졌다. 그러자, 모친을 따라 웃던 그의 반듯한 미소도 반쯤 사그라 졌다. 위험하다. 그러나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어머니의 위력적인 손바닥이 그와 동생의 잔등을 있는 힘껏 후려치신다.

“그렇게 효자인 놈이 어미가 주선한 맞선 자리에 나가서 그런 실례를 저지르고 나와! 너, 아주 이 어미 얼굴에 먹칠을 하기로 작정을 한 게 아니냐? 이 고얀 놈!”
“어머니, 도, 도진이랑 미주가 보는 앞에서...”
“동생이랑 조카 앞에서 창피한 걸 아는 놈이 남의 집 처자 앞에선 그런 부끄러운 짓을 해! 내가 신 여사한테 그 소리 전해 듣고 얼마나 낯뜨거워졌는지 알아? 이놈! 이 불효 막심한 놈!”

이런 제기랄, 등짝을 강타하는 어머니의 매운 손바닥 공격과 목소리를 듣자 하지 그 문제의 맞선녀는 자리를 주선한 ‘뚜 아줌마’한테 그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일러바친 모양이다. 전형적인 양갓집 규수처럼 굴길래 그런 소리를 누설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여자는 바보였다. 바보가 아니었다면 자기가 바보취급 당했다는 그런 존심 상하는 소리를 제3자에게 불어 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 이유가 없지. 새삼 도영은 그런 여자를 딱지 놓은 자신의 혜안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어머니의 손바닥은 무척 아팠지만 말이다. 대가라고 생각하자. 그런 엉터리 맞선녀의 마수에서 풀려날 수 있었던 대가라고. 옆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도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주 생일이라 좀 덜 맞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덜 맞는 정도가 아니라 형이 나 대신 다 맞아 주는군. 랄랄라라. 음, 역시 형제는 많을수록 좋은거야.’

문득 그는 오늘 생일을 맞은 조카 미주의 아버지, 지금은 세상에 없는 큰형을 떠올렸다. 예전엔 큰형이 어머니로부터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는데, 큰형이 가고 나선 작은 형이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있다. 하지만 두 형에겐 크나큰 차이점이 있었으니, 큰형은 무조건 막내인 자신을 감싸주었지만, 작은 형은 우선 자신이 먼저 동생을 주먹으로 응징한다는 것이다. 아, 큰형. 오늘같이 작은 형한테 얻어터진 날은 형이 더 그리워. 그런 그의 상념은 오늘의 생일 파티 주인공인 조카 미주가 도진의 다리를 붙들고 그가 들고 서 있던 케이크 상자를 손짓으로 가리킴으로서 끝장이 났다.

“어? 미주, 배가 고픈 모양이구나”

막내 삼촌의 질문에 머루같이 까만 눈동자를 하고 있는 포동포동한 뺨의 여자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 자신도 오늘 하루 종일 운전학원에서 arj은 컵라면을 빼곤 먹은 것이 없었따. 그는 형이 사오고 자신이 들고 온 케이크 상자를 풀며 어머니와 형에게 소리쳤다.

“자아! 그만 하시고 빨리 시작하죠! 배가 고파서 죽겠어요. 미주도 배고프데요. 자아, 미주야. 우리 큰삼촌이 사온 케이크 구경하자. 어디 얼마나 근사한... 어?”

동생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끊기자 식탁에 다가오던 도영의 얼굴도 약간 굳어졌다.

“왜 그래? 그때 그 살인면허가 뒤에서 차를 박았을 때 상자가 좀 흔들렸는데 케이크 뭉개지기라도 했냐?”

그런 형의 질문에 동생은 약간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뜬금 없이 이렇게 말했다.

“그게 아니라 이 케이크, 우리게 아닌 것 같아.”
“뭐? 무슨 말도 안되는! 내가 분명히 샹들리에 호텔 제과부에 예약을 해서 가져왔는데...”

하지만 거기까지 말하던 도영도 풀어헤쳐진 상자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케이크를 보곤 말을 끝맺지 못했다. 도진의 말대로 그것은 그들의 케이크가 아니었다. 장미주의 일곱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가져온 케이크에 ‘한지유의 일곱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라는 글씨가 크림으로 정성껏 써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디서 바뀐 모양인데?”

한동안 케이크를 내려다보던 도진이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자신의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긴 것은 그로부터 30초 후의 일이었다.

“맞다! 아까 형 차 박은 삼순이 누나! 그 누나도 오늘 조카 생일이라고 케이크 상자를 들고 있었는데, 그때 경찰서에서 바뀌었나 봐.”

***

“케이크가 바뀌었어!”

색색가지 과일로 화려하게 장식된 케이크 위에는 ‘미주의 일곱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라는 글자가 멋스럽게 쓰여져 있었다. 이모가 자겨 온 케이크 상자를 잔뜩 기대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던 지유의 얼굴엔 한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이 스쳤다. 삼순도 낭패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원래대로라면 이 상자 안에는 분명히 선배 언니가 일하는 제과점 작업실을 빌려서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공룡모양의 케이크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여 만든 귀연 공룡은 어디로 가고 이렇게 알록달록한, 화려하지만 재미없는 케이크가 상자 안에 버티고 있단 말인가.

“또 어디다가 흘린 게로군.”

가정이 아닌 확신에 가득한 어조로 이영언니가 말하고 있다. 하지만 언니는 “너 하는 짓이 늘 그렇지.”라고 말하지 않고 그 순간 할 수 있는 다른 질문을 했다.

“오늘 어디 어디 들렀어? 기억은 다 하고 있니?”

언니의 물음에 삼순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가며 오늘 자신의 발자취를 돌이켜 보았다.

“작업실에서 나와서 분식점 들러 똑볶이랑 순대 사먹고, 운전 교습하러 가서 교습 전에 매점 들러 핫바 하나 먹고, 아, 그게 아니지. 음, 어쨌든 그 뒤에 그 밴댕이 사이코 차를 박아버려서 어쩔 수 없이 경찰서 같이 가고... 맞다! 경찰서!”

그제서야 삼순은 그 재수없는 남자에게서 빨리 떨어지고자 서둘러 상자 둘 중에 하나를 집어 들고 경찰서에서 뛰쳐나왔던 것을 기억했다. 분명히 그 남자가 들고 있던 상자는 그녀의 상자와 크기와 색상이 비슷했다. 정말 이번에도 징크스가 확실한 제 구실을 하고 있다. 이런 제기랄! 그놈의 사이코가 사람 참 여러 가지로 열 받게 하는 구나.

“그래도 이 케이크, 꽤 비싸 보이는데? 뭐 어때. 케이크와 케이크가 맞바뀌었다니 그나마 먹지도 못하는 것하고 바꿔 가지고 온 것보단 낫지. 아아, 배고프다. 그냥 이거나마 초 꽂고 빨리 시작하자.”

언제 어느 때나 쓸데없는 감정 낭비는 안 하는 이영 언니는 그렇게 풀 죽어 있는 삼순을 위로하며 그 화려한 케이크 위에서 미주라는 이름을 재빨리 긁어 내고 초를 꽂기 시작했다.

이영언니의 말대로 폭탄 상자나 비누 종합선물 세트 같은 먹지도 못하는 상자보다 케이크 상자와 케이크 상자가 바뀌었으니 그나마 낫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삼순은 억울했다. 자신이 아끼는 ‘지니’를 이모에게 양보할 정도로 착한 지유에게 열심히 만든 회심의 역작을 선물하고 싶었는데 그 연두색 공룡 케이크를 만드는 동안 -밀가루를 체치고, 계란을 깨트리고, 버터를 중탕하고, 생크림을 부풀리고, 공룡의 형상을 빗고, 마지막으로 ‘생일 축하해’라는 글자를 조심스럽게 써내려 가는 내내- 그녀는 착하고 귀여운 조카가 언제나 건강하고 행복하고 씩씩하게 자라기를 기원했었다. 그 기원이, 그 축복이 담긴 케이크를 그 원래 주인에게 먹이 수 없다는 것인데, 지금쯤 그 케이크가 그 얄미운 남자의 입 안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삼순은 화가 났다. 하지만 여자는 어쩔 수 없이 그 지나치게 화려한 케이크에 초를 꽂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조카가 소원을 비는 것을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마지막에 케이크가 조각조각 식구들의 접시에 나뉘어졌을 무렵, 그녀 자신의 몫으로 덜어진 케이크에 꽂히는 삼순의 포크 질은 평상시보다 난폭해 보였다.

그 순간, 조각난 화려한 케이크 조각이 그녀의 눈에는 그 밉살맞은 남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눈앞에 있다면 확 이 삼지창 포크로 그 잘난 콧구멍을 찔러 주고 싶다. 에잇!

***

“그 누나 조카도 오늘 생일이라고 했거든. 자기가 뭐, 파티쉐라던가 어쨌든 직접 만들어서 선물할 거라고 했어. 흠, 솜씨 괜찮은데. 기계치이긴 하지만 손재주는 있네.”

그 이상한 여자에게 운전연수를 시키고 있다는 동생에게서 설명을 들었음에도 케이크를 바라보는 도영의 얼굴을 상당히 떨떠름했다. 일곱살 여자아이가 받으면 좋아할 만한 색색가지 과일을 꽃처럼 얹은 케이크가 저런 공룡으로 둔갑을 해 버렸으니 그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요컨데 그 살인면허 지망생이 만든 공룡이라 그거군. 먹을 수는 있는 건가?”

도진은 그 살인면허 지망생이 현재 일터에서 잘린 백수라는 사정은 이 시점에서 밝히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신기한 듯 공룡 케이크를 바라보는 미주를 향해 웃어 보이며 공룡의 배에 플라스틱 칼을 꽂는다. 곧 공룡은 머리와 몸통과 팔 다리가 분해 되어 각자의 접시로 갈라졌다.

“오오, 맛있는데?”

15초쯤 후, 처음으로 삼킨 케이크 조각이 입안에서 다 녹을 무렵, 첫 번째 감탄사가 도진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흠, 단 건 별로 내키지 않는데 이거 괜찮구나.”

그 다음은 어머니. 도진이 저 녀석이야 집에 붙잡혀 들어온 첫날 분위기를 띄울 의무가 있으니까 먹고 죽지 않을 정도만 되면 맛있다고 너스레를 떨겠지만, 어머니의 반응은 의외다. 오늘의 주인공 미주조차도 ‘장미주의 생일을 축하한다’가 아닌 ‘한지유’라고 씌어진 그 공룡 케이크에 만족을 표시한다. 흠, 아무래도 먹고 죽을 만한 성질의 공룡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디 그럼... 미심쩍다는 얼굴로 도영은 공룡 조각 중 얼마간을 포크로 찍어 자신의 입에 넣어 보았다. 곧, 한 입은 두 입이 되고, 세 입이 되고, 접시는 얼마 안 가 깨끗이 비워졌다. 30초 후, 도진은 형의 얼굴에서 다음과 같은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굳이 그걸 글자로 표현하자면, 목욕을 하다가 진리를 깨우친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쳐댔을 때의 표정 갔다고나 할까?

“그 살인면허, 파티쉐라고 그랬지? 이거, 그 여자가 만든 게 분명해?”
“그,글쎄. 그렇다고 들었는데.”

동생의 대답에 도영은 곧바로 식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뭐 하는 거냐?”

어머니의 날카로운 질문에 자신이 벗어둔 양복 재킷 주머니를 이 잡듯 뒤지던 도영의 눈에 얼핏 미소가 스쳤다. 쓰고 있는 광관이 순금인지 아닌지 밝혀 내라는 왕의 명령에 전전긍긍하다가 목욕탕의 흘러 넘치는 물에서 그 방법을 생각해 냈다는 아르키메데스처럼 자신에게 닥쳐올 시련에 대한 구원의 해답을 얻은 자가 지을 수 있는 그런 미소를 지으며 남자가 말했다. 꼭 “유레카!”라고 소리칠 것 같은 눈부신 미소를 지으면서.

“화가 복이 될 것 같아서요. 호박이 넝쿨째가... 아, 아니 쓸만한 파티쉐가 저한테 굴러 들어 오는군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그 여자의 명함을 찾아보니, 작은 사각형에 그녀의 이름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김삼순.

흠, 다시 봐도 역시나 촌스런 이름이다.

***

약속 장소인 그 으리으리한 레스토랑 앞에 도착해서도 한참 동안 삼순은 차마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녀는 아직도 어제 받은 그 사이코로부터의 전화를 믿어도 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김삼순 씨?”

저녁을 먹는 도중 걸려온 전화, 그 전화선 너머에 그윽한 남자의 목소리가 자신의 귀를 간질였을 때, 그녀는 어리둥절 했다. 누굴까. 몇 년 동안 애인이 있는 여자로서 다른 남자 보기를 돌같이 한 결과 이렇게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를 사람이 없었는데, 그리고 아직 이렇게 늦은 저녁시간에 자신을 다정히 부를 남자를 마련하지 못한 상황인데, 그래도 이런 예의바른 목소리엔 마찬가지로 예의바르게 통화해 주는 게 낫헸지 싶어 그녀도 한껏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잠시 동안 수화기 너머에서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그녀가 다시 “여보세요?”라고 묻기 직전 수화기 너머에서 대답이 흘러 나온다. 이번에도 역시 멋진 목소리다.

“장도영이라고 합니다.”

장도영? 그게 누구야? 잠시 후, 보충 설명이 뒤따랐다.

“오늘 댁이 뒤에서 박아버린 차 주인이오.”

5초 전까진 근사하다고 느꼈던 그 목소리가 갑자기 몹시도 느끼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사실에 삼순은 경악했다. 또한 이 남자가 이 야밤에 이다지도 다정한, 혹은 느끼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에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보세요, 댁의 동생 편으로 영수증 보내 주시면, 입금을 할 거라구요. 지금 그것 못 믿어서 이 시간에 전화까지 하는 거예요?”

삼순은 기본적으로 ‘전화는 상냥하게’라는 태도를 지켜왔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그런 여자의 냉기가 뚝뚝 흘러넘치는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 남자도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 “실례지만 누구시죠?”라고 물었을 때와는 180도 다른 목소리. 여자가 대하는 사람에 따라서 목소리를 달리하는 경우를 도영도 종종 알곤 있었지만, 리베라의 장도영 자신에게 이렇게 확 돌변하는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은 전화선 너머 살인면허가 최초다. 낮에 경찰서에서 뒤통수에 대고 한 ‘살인면허’ 소리에 이 여자가 꽤 발끈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쯧. 다음부턴 아무리 우스워 보이는 여자한테라도 욕은 들리지 않게 해야겠다. 그의 짧은 침묵에 수화기 너머 그녀가 샐쭉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더 이상 하실 말씀 없으면 이만 끊었으면 하는데요.”
“물론, 할 말이 있습니다. 꽤 중요한 일이에요. 댁에게나 나에게나.”

여자가 냉기 흐르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거나 말거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녀가 뜨거운 물을 뒤집어 쓴 고양이처럼 틱틱대고 있지만 그에겐 그 오동통한 고양이에게 흔들어 댈 근사한 미끼가 있었으므로, 여자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당신과 나 사이에 중요한 일이 자동차 수리비 말고 뭐가 또 있는데?”라고 묻기 직전 그가 말했다. 사업 이야기를 할 떄면 늘 그렇듯이 반짝반짝 어여쁜 미소를 지으면서.

“김삼순씨, 지금 댁에서 거절할 수 없는 제안 한 가지를 하죠.”

백수에게, 그것이 한 시 바삐 직장을 구해 나날이 눈치를 주는 엄마의 눈치에서 탈출할 필요가 있는 백수에게 일자리를 주겠다는 제안은 정녕 뿌리치기 힘든 것이었다. 비록 그 일자리를 제안하는 상대가 천하의 재수없는 사이코남이라고 하더라도.

“전화위복이로군. 가서 잘 해봐.”

엄청난 액수의 자동차 수리비가 일자리가 되어 돌아왔다는 삼순의 말에 언니 이영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 언니에게 삼순은 약간 불안한 얼굴로 물었었다.

“그게 정말 복이 된 화인지, 아니면 끝까지 화로 남을 화인지 어떻게 알아? 그 인간 믿을 수 없으리만치 괴상망측한 싸가지라고.”
“네가 지금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니?”

언니의 말이 삼순의 폐부를 깊숙이 찔러왔다. 어찌나 깊숙이 찔렀던지 먹고 있던 감자칩에 사래가 들릴 정도다. 김삼순은 다이어트엔 소질이 없어도 케이크 만드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케이크 만들 줄 아는 기술자가 하늘의 별만큼은 아니더라도 무지무지 많다. 그리고 그 중 상당수는 열심히 일자리를 구하고 있다. 그렇다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꼽지만 그녀는 일자리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에잇! 확 시집이나 가 버릴까.’라는 마음은 일전의 그 8대2 가르마를 만난 뒤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자기 아버지가 삼촌에게 독살 당하고 어머니가 그 독살가와 재혼을 했다고 그런 식으로 고민을 했단다. 일자리가 궁한 삼순은 이렇게 고민했다.

- 찾아가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몇 시간 동안 고민한 끝에 결국 그녀는 현실에 굴복했다. 언니의 말대로 지금 김삼순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역시 현대여성은 일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결국 삼순은 이렇게 남자가 알려준장소로 이력서를 들고 찾아오게 되었다. 혹시나 그 악당이 요새 한창 기승을 부리는 취업사기꾼은 아닐까 잠시 고민은 했지만 그녀는 곧 심호흡을 하고 씩씩하게 레스토랑의 문을 열어제쳤다.

그 남자가 취업 사기꾼이면 또 경찰을 부르면 될 일이다. 한 번 한 짓. 두 번은 못하겠어?

***

면접을 볼 때는 늘 긴장이 된다. 맞선 볼 때하고 느낌이 비슷하다. 짧게는 3분, 길게는 30분 정도 안에 나를 평가를 받는 다는 것은 늘 부당하다는 느낌이 든다.

“XX상고 졸업, OO물산 6개월 근무, 그 뒤에 사브리나 제과점 근무, 다시 XX제과학교 1학기 수료, 그 뒤에 프랑스 세프 푸조랑에서 2년 일하고 코르동 블루 제과부에서 3학기 수료, 제과점 낭트에서 올 봄까지 근무하다가 퇴사라.”

맞은편 의자에 앉아 그녀가 써온 이력서를 읽어 내려가는 그 남자 장도영의 목소리를 듣자니,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10년 인생이 저렇게 짤막하게 몇 줄로 단축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삼순은 그저 놀라웠다. 사실 나는 저 서류 안에 쓰여진 내용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인데, 쳇. 사회생활을 10년 가까이 한 지금까지도 그녀는 이 ‘현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의 상념은 그녀의 앞에 앉아 있던 남자의 목소리에 의해 끊겨졌다.

“프랑스까지 다녀오셨군. 그런데 학업은 왜 도중에 그만두셨는지?”

공룡 말고 다른 작품을 만들어 오라는 주문에 따라 삼순이 가져온 케이크를 다른 조리장들과 나누어 시식을 한 뒤, 그의 표정은 한결 누그러졌다. 그 순간 삼순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가 떠올랐다. 침착한 사업가의 얼굴을 하고 면접을 보고 있는 이 남자가 어제 “그 쪽은 면허를 안 따는 게 좋을 것 같은데.”라고 빈정거렸던 그 인간과 정녕 동일인물이란 말인가.

“동일인물 맞습니다. 자아, 도움 안 되는 과거는 잊어버리고 일 이야기를 합시다. 왜 그만 두셨죠? 계속 했다면 경력에 도움이 되었을 텐데.”

흥, 자기한테 불리한 일은 빨리 잊어버리라 그거지? 그러니까 공저인 관계일 때와 사적인 관계일 때는 구분을 짓는다는 말이었다. 근무시간 외에 자기 차를 찌그러뜨린 여자한테는 ‘살인면허’라고 쏘아 붙일 순 있어도 공적으론 정중하게 대하겠다는 뜻인가 보다. 뭐, 그 쪽이 나한테도 낫겠지 싶어 그녀는 그의 질문에 간단히 대꾸했다.

“이 쪽도 도움 안 되는 이야기이긴 마찬가지예요. 별 거 없어요. 학비 대기에 허리가 부러질 것 같아서요.”

그가 공식적으로 물었듯이, 그녀는 공식적으로 대답했다. 그 쪽이 남들이 듣기에 훨씬 그럴 듯 했기 때문이다. 사실 학비에 생활비가 부담스럽긴 했어도 그만 둔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남자 때문이었다. 일을 배우고 혹시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것처럼 멋진 남자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간 그곳에서 만난 멋진 남자 민영우 때문에. 서로가 유학생 신분으로 만난 그 곳에서 그녀는 영우에게 홀딱 반했고, 영우도 주변 사람들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그녀를 ‘사랑’했다. 지금에 와서 삼순이 생각하기에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모양이었다. 벌어서 가져왔던 돈도 떨어지고, 향수병으로 푸른 눈동자의 백인들이 득시글 대는 외국이 지긋지긋해 졌을 때, 마침 눈 앞에는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의 멋진 한국 남자가 나타났다. 사랑에 빠지고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귀국하는 그를 따라 그녀도 한국에 돌아왔던 것이다.

‘아아, 그때가 좋았지. 너 없으면 못살겠다고 찰싹 붙어서 같이 비행기까지 타고 돌아왔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긴다. 영원히 계속될 줄 알았던 그 행복의 기한은 딱 3년 정도였다. 영우가 다시 공부를 하겠다고 프랑스에 이어 미국으로 날아가면서, 거기서 다시 그의 표현에 따르면 운명의 여자 오미영을 만나면서 그들의 관계는 끝장이 났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 유학 갈 때마다 새 여자가 생기는 모양이다. 다음에 또 다른 제 3국으로 유학을 간다면 제3의 여자가 등장하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에 잠기던 여자는 면접 보는 남자의 다음 질문에 화들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전 직장에선 왜 그만뒀습니까? 낭트라면 업계에선 꽤 튼튼한 직장인데.”

삼순이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배신자에게 매운맛을 보이느라 어쩔 수 없었죠. 하지만 그녀 나이 스물 아홉, 이제는 해서 될 말과 안 될 말을 구분할 능력은 갖추고 있다.

“그곳 윗 분하고 케이크를 대하는 견해에 차이가 있었어요. 가져가셨던 그 공룡 케이크처럼 전 좀 실험적인 작품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서요.”

오늘 새벽까지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려가며 나름대로 생각해 놓은 이유를 대면서 그녀는 슬쩍 면접관의 안색을 살폈다. 통할까? 통해야 하는데. 도영은 그럴듯한 대답을 늘어놓는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가 댄 이유는 그가 납득 할 만한 것이었다. 어느 직장에서나 상사와의 트러블은 잇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의 시야에 비춰진 그녀의 얼굴 어느 한 귀퉁이에서 어떤 낌새가 느껴진다.

“그게 답니까?”
“그게 다예요.”

여자의 대답에 남자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게 다는 아닌 것 같지만 뭐, 지금으로선 내가 알 바 아니지,라는 식으로... 잠시 후 남자가 말했다.

“내일부터 일 할 수 있겠습니까?”

브라보! 만세! 심봤다! 속으로 튀어 나오려는 그 모든 환호성을 억지로 눌러 삼킨 채, 그녀는 다시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이것 역시 지난 밤새 생각해 놓은 것이다.

“대신 조건이 있는데요.”
“조건? 보수라면 일단 저 번 직장과 동일한 선에서 지급하도록 하지요.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 가게에선 이제까지 프랑스 본토 기술자를 데려와 썼습니다. 이 번에 영입했던 파티쉐가 갑자기 쓰러져 버려서, 우리에게도 김삼순 씨를 기용한다는 건 일종의 모험입니다. 그 모험에 그 쪽이 보답을 해 준다면 그 후 얼마든지 원하는 선에서 인상을 할 겁니다.”

협상을 하는 데 능숙한 남자의 말에 새초롬 한 얼굴의 여자가 물었다.

“보답을 못한다면 자르겠다는 건가요?”
“자본주의 사회니까요.”

저건 못하면 가차없이 자른다는 소리 맞지? 여자의 얼굴이 떨떠름해지자 안경렌즈 너머 남자의 눈동자가 씨익 미소 짓는다. 해적의, 혹은 악어의 미소 같다.

“그리고 입사를 축하 드리는 의미에서 어제 자동차 수리비는 특별히 50% 깎아 드리도록 하지요.”

전부 다 없애주는 것도 아니고 50% 깎아줘? 흥, 있는 놈이 더 무섭다는 말이 진리로군.

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삼순은 이제 얼굴에서 경계의 표정을 풀고 한껏 위엄 어린 표정을 지었다. 못하면 자른다고 하는데 그럼 잘 하면 될 일이다. 먼저 직장에서도 지각을 하거나 뭔가를 꼬투리 잡는 고객과 신나게 싸워서 야단 맞은 적은 있어도 케이크 때문에 욕을 먹은 적은 없었다. 이쪽이 그녀의 케이크에 반한 이상 이제 칼자루는 그녀가 쥐고 있다.

“돈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에요. 그것 말고 사장님께 다른 부탁이 있어요.”

처음 제과점에 취직했을 때 하루 열 두시간을 일하면서 첫 월급으로 60만원을 받은 그녀였다. 그나마도 처음 다섯 달은 일이 너무 힘들어서 도중에 그만 두는 사람이 많다고 그 중 10만원씩을 떼어 여섯번째 월급 봉투부터 조금씩 나누어 주었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월급은 상당한 액수다. 그렇게 단단한 얼굴로 청하는 여자에게 그녀의 고용주가 될 남자는 수상쩍다는 얼굴을 하고 물었다.

“돈이 아니라 다른 문제? 내가 그 쪽에게 들어 줄 수 있는 게 그것 말고 또 있나요?”

잠시 후, 여자의 입술에서 뭔가 요구조건이 흘러 나왔다. 다 듣고 난 그의 눈썹이 묘하게 찌푸려졌다.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일을 겪게 되었을 때 그의 버릇이다. ‘별 희한한 여자 다 보겠네.’라는 얼굴로 남자는 여자에게 재차 확인하듯이 물었다.

“그게 요구 조건이요? 보수를 더 받는 것보다 그걸 원한다는 거요? 정말?”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한, ‘당신 또라이 아니야?’라고 묻는 듯한 마자의 질문에 여자는 몹시도 단호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그게 정말, 정말 제가 원하는 거예요.”

그 날, 그녀는 레스토랑 리베라에 정식으로 채용되었다.

브라보! 만세! 만만세!


4. 하늘에서 남자들이 비처럼 내려와

브라보! 만세! 만만세!

출근 첫날 하얀 위생복을 입고 상의 왼쪽에 박힌 자신의 직원용 명찰을 보는 여자의 얼굴 표정에 드러난 그 소리 없는 만세삼창을 도영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만세란 그 옛날 유관순처럼 독립운동을 할 때 외치는 거이거나, 요새 유행하고 있는 로또에 당첨될 때만 부르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자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동물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다른 직원들에게 그녀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인사들 하시죠. 오늘부터 함께 일하게 될...”

도영의 손이 삼순을 가리킨다. 잠시 후, 그가 말을 이었다.

“김희진 씨를 소개합니다.”

정말로 그녀의 오른쪽 가슴에 달린 명찰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김삼순이 아닌 김희진이라고. 그녀가 원했던 그 대단히 중대한 조건을 들었을 때, 그는 자기 귀를 의심했었다.

“다른 직원들 앞에서 김삼순 대신 김희진이로 불러달라고?”
“그래요. 그 쪽이 사장이니까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지요?”

예전에, 지금보다 더 예민한 여고생이었던 무렵, 삼순은 이름표를 맞추는 문구점에서 ‘김희진’이라는 이름표를 만들어 달고 다닌 적이 있어다. 여자는 그 이름이 썩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선도부 선생에게 가짜 이름표가 들통나는 바람에 그녀는 김희진이란 이름을 압수당하고 도로 김삼순이 되어야 했던 뼈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들통나기 전까지 그녀는 김희진으로 행복했었다. 학교 밖을 나서면 여학생은 자신의 명찰을 떼어내는 것이 관례였는데도 당당히 그 이름표를 붙이고 다닐 만큼, 이제 스물 아홉이 된 그녀는 다시 그 이름을 되찾으려 하고 있다. 취업이 결정되면 직장에 등본을 제출해야 한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이 김삼순임을 직장에서 누구든 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직장 우두머리가 이렇게 협조를 한다면 그녀는 김삼순이 아닌 김희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 하필 김희진이요? 다른 이름도 많은데.”

뭔가 대단히 불편한 듯한 표정을 하고서 남자는 그렇게 물었다. 여자의 대답은 뜻밖에 간단했다.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요.”

하마터면 삼순은 거기서 이 말을 더 덧붙일 뻔했다.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김삼순이란 이름을 달고 살면서 삼순이 취급을 받기가 싫증이 났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 말은 삼킨 채 삼순은 확고부동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마음에 드는 이름을 달고 살면 뭐든 잘 될 것 같거든요. 김삼순보단 김희진표 케이크가 더 괜찮을 것 같지 않아요?”

지금까지 별에 별 인간을 상대하며, 별에 별 인물들을 고용했던 도영이지만 이런 근로 조건을 요구한 인종은 생전 처음이었다.

그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그녀는 김희진이 되었다.

김희진이 된 그녀에게 리베라는 천국이었다. 첫 출근을 하고 그 곳의 직원들과 대면하게 되면서 삼순이 마음속으로 지른 소리는 다음과 같다.

- 심봤다아아아!

하루 열 두시간 이상의 격무라 주방에는 여자라곤 그녀뿐이다. 그런 그녀 앞에 경력대로 다른 색깔의 ?청색, 분홍색, 노랑색, 흰색 등등의- 머플러를 한 하얀 제복의 남자들이 우글거렸다. 그 뿐인가. 가뭄에 콩나물 나듯이긴 하지만 매장에 잠깐씩 나갈 때면 서빙을 하고 있는 꽃미남 가르송(급사) 부대가 또 한 가득이다. 하얀 실크 셔츠에 나비넥타이, 꽃무늬 조끼에 검은 앞치마까지 두른 그 어여쁜 모습이라니. 아아, 너무 황홀해서 감격의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마침내! 김삼순 인생에 봄이 온 것인가!’

눈이 호강을 하면, 몸에서도 기쁨의 엔도르핀이 마구 생긴다. 당연히 이레도 능률이 오른다.

“주문하신 디저트 니다베유(벌꿀 무스) 나왔습니다.”

화사한 얼굴의 가르송이 자신처럼 화사한 꽃무늬 접시에 담긴 레몬 빛 케이크 조각을 손님에게 내민다. 아름다운 여자 손님은 접시를 보고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와 동행인 약간 넉넉한 체구의 남자는 그런 그녀에게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아이, 나 요새 다이어트 해야 하는데, 벌꿀처럼 달콤하게라니, 이이는 그런 말 할 줄도 모르는데. 정말 여기 디저트가 전보다 더 괜찮아졌다. 파티쉐가 센스도 있는 것 같고.”

벌꿀에 복숭아의 맛이 환상적으로 조합되어있다. 남자는 손가락을 둥글게 구부려 OK 사인을 보낸다. 이렇게 해서 모종의 여자문제로 아내와 냉전 중이었던 단골, 모 그룹 후계자라는 A급 고객을 만족시켰다. 가르송이 전해준 그 신호에 삼순도 손가락으로 브리자를 그어 보인다. 음, 이제 얼마 안가서 월급도 올려 달랠 수 있겠지. 한창 바쁜 때가 지나고 그녀는 직원 라운지에서 어깨를 두들기며 자판기 커피를 홀짝였다.

“이런 불경기에 와이프 데리고 이런 비싼 밥집을 오는 사람이 아직도 꽤 있다니. 아아, 그런 여자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렇지 않아요. 희진언니?”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웨이트리스로 이곳에서 근무하게 된 스물두 살 은애의 종알거림에 삼순은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이렇게 읊조리면서.

‘다른 여자하고 바람 피운 게 찔려서 선심 쓰는 것만 아니라면 아주 괜찮지. 어떻게 그 인간은 애인하고 온 데를 부인하고 또 올 생각을 했을까. 나 원. 하여간 남자라는 족속들은.’

그러나 마치 엄청나게 큰 롤리팝 사탕을 바라보는 어린아이같이 달콤함과 동경이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는 어린아이에게 그런 신랄한 진실을 말해 줄 순 없는 노릇이다. 스물 두살의 은애는 그녀보다 자그마치 일곱사이나 어리고, 14kg이나 날씬하다. 얼굴도 그만하면 귀엽다. 예쁘고 날씬하고 거기다가 젊기까지 하다니. 예쁘지도 않고 날씬하지도 않으며 젊지 않은 삼순에겐 상당히 대하기 껄끄러운 족속이다. 하지만 은애에겐 그 껄끄러움을 상쇄시킬 만한 몇가지가 있다.

“난요,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까진 아기는 황새가 물어다 주는 줄 알았어요. 흠, 결국 남자와 여자의 합작품이란 건 알게 됐지만. 아아, 나도 어서 합작할 사람 만나고 싶어. 그래서 그 사람하고 이런 데 저녁 먹으러 오면 얼마나 근사할까. 세상에 밥 한끼가 내 한달 월급하고 맞먹다니. 난 아직도 실감이 안 나는 것 있죠?”

이렇게 그녀는 순진했고,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도 삼순과 마찬가지로 순대와 떡볶이에 환장했다. 또 삼순과 마찬가지로 꽃미남 부대가 포진 되어 있는 이 직장을 상당히 솔직하게 좋아하고 있다. 그래서 삼순도 입사 동기인 이 어린 처자와 종종 커피를 마시며 노닥거리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귀여운 입술에서 나오는 저 호칭. ‘희진 언니’라는 소리가 아주아주 마음에 든다.

“정말 여긴 즐거워요. 하루 열 두시간씩 서 있느라 종아리는 팅팅 붓지만, 우리 사장님 같은 분을 비롯해서 가르송 오빠들도 너무너무 멋지고 귀엽구.”

음, 그러나 역시 별개의 인간이니만치 사소한 의견의 차이는 존재한다. 우리 사장이 귀엽다니. 무슨 그런 말씀을.

“사장이 귀여워?”

황당하다는 얼굴로 묻는 삼순에게 은애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다.

“왜요? 언니는 안 귀여워요? 난 귀여운데? 저 정도면 특A급 킹카잖아요. 뭐, 예전에 교통사고를 크게 당하셔서 비 오는 날 같은 때는 걷는 게 약간 불편하시다곤 해도, 그래도 난 저렇게 멋진 남자는 태어나서 처음 봤어요. 나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체육선생님보다 더 멋진 것 같아.”

세상에는 참 다양한 취향이 공존한다. 음, 케이크에 관해서도, 그리고 남자에 대해서도.

***

만약 삼순이 은애처럼 스물 두 살 때쯤 장도영을 만났다면 그녀 역시 저 남자의 멀끔한 외모와 직장 내에서의 반듯한 매너에 속아서 그를 귀엽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녀는 스물두 살이 아닌 스물 아홉이었다.

‘그렇지. 스물 아홉이지. 이렇게 열심히 맞선을 봐야 하는.’

오늘도 어김없이 그녀가 맞선 장소로 나온 그 호텔 커피숍, 그녀의 맞은편에는 늘 그랬듯이 평범한 인상의 상대남이 있다. 그리고 요 몇 달 새 늘 그랬듯이, 그녀의 자리에서 두 개쯤 떨어진 테이블에선 약간 들뜬 여자의 목소리와 심드렁한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모님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집안끼린 꽤 오래 알고 지낸 사인데 이렇게 뵙기는 처음이네요. 그동안 왜 모임에 잘 나오지 않으셨어요?”
“뭐, 제가 워낙에 사람 많은 곳엔 잘 가지 않는 소심한 성격이라서요.”

건너 건너 들려오는 그 남자, 자신의 고용주 장도영의 목소리에 삼순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참, 이것도 무슨 해피한 인연인지 그녀는 한 달에 한 번 있는 정기 휴일에서조차 저 사장과 마주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늘 그녀가 맞선을 보는 곳에서 테이블이 두 개쯤 떨어진 위치에 그 남자도 맞선을 보고 있는 것이다. 독창성도 없는 인간 같으니. 어떻게 매번 한다는 대사가 그것 뿐이야? 이제 그 상대인 맞선녀가 이렇게 말하겠지?

- 지금은 다른 일을 하시고 계신다 들었지만, 곧 집안 일로 복귀하시겠지요?

그런데 이번 여자는 먼젓번 여자보다 고단수인 모양이다. 스스로를 소심한 성격이라고 뻥을 치는 남자에게 여자는 반갑다는 듯한 음색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머나! 저도 밖으로 나다니는 것 싫어하는 타입이에요. 새삼 반갑네요.”

그런 것치곤 목소리가 꽤 밝은데. 삼순은 여자의 다정스런 목소리에 피식 쓴 웃음을 머금었다. 그 모습에 앞에 앉아 있던 그녀의 상대남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길래 그렇게 즐거우신지 저도 듣고 같이 웃으면 안될까요, 희진씨?”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신경 쓸 상대는 저쪽 건너편 테이블이 아니라 눈앞의 이 남자임을 상기했다. 그녀의 눈앞에 앉아있는 남자는 지극히 평범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만약 일이 잘 되어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두 번째 약속 장소에서 이 사람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특징 없는 얼굴의 소유자다. 마르지도, 찌지도 않은 적당한 체격에 뾰족하지도 둥글지도 않은 얼굴. 평범한 눈이 두 개, 코가 하나, 입이 하나다. 입고 있는 옷도 무난한, 그야말로평범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 평범한 입술에서 나오는 ‘희진 씨’ 소리는 짜릿할 정도로 기분이 좋다.

그녀는 오늘 맞선을 나오기 전, 자리를 주선한 진숙이 아줌마에게 부탁을 했었다. 김삼순이 아닌 김희진으로 자신을 소개하라고.

“김희진이라니. 상대를 속이라는 거니?”

가재미 눈을 하고 자신에게 묻는 뚜 아줌마에게 삼순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속이는 게 아니라 ‘바꿔’달라는 거에요. 그 편이 아줌마의 성사율을 더 높일 수 있다는 생각 안 해 보셨어요?”

먹기 좋은 떡이 더 좋듯이, 이름이란 부르기에도 더 좋아야 한다. 김희진이 되면서 그녀는 직자에서도 일이 잘 풀리고 있다. 그건 아마 맞선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행히도 아줌마는 삼순의 주장에 납득을 했고, 그래서 그녀는 맞선 장소에서도 김희진으로 불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남자 얼굴을 보아 하건데 작전은 주효했던 모양이다.

“사실 저는 맞선 같은 것, 그다지 내켜 하지 않았었는데 오늘 희진 씨 뵙고나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인상도 좋으시고, 듣자니 큰 가게에서 전문직 일을 하신다죠? 제가 많이 부족하지만 오늘 좋은 인연이 되었으면 하네요.”

그녀가 은애처럼 스물 두 살이라면 저렇게 소박한 남자의 소박한 호감 표시에 따분해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스물 두 살이 아닌 스물 아홉이었다. 연애 소설을 자주 보지만 이제 소설은 소설이고, 현실은 이런 호텔 커피숍에서 더 시작될 확률이 높다는 것쯤은 안다. 그리고 오랜만에 자신에게 쏟아지는 그 호감이 그다지 싫지 않다. 아니, 썩 좋았다.

‘좋았어! 이 기세를 몰아서 앞으로 한 시간 이상 이 호감이 지속 된다면 역사를 만들어 보는 거다!’

삼순은 그럴 생각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으로 보건데 오늘은 그럴 수 있는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렇게 역사를 만들자고 마음먹은 지 채 3분도 지나지 않아서 건너 건너편에서 맞선을 보던 그녀의 고용주가 갑자기 그녀의 앞에 다가오지만 않았다면.

그리고 삼순에게 호감을 표시한 맞선남 앞에서 다짜고짜 그녀를 끌어안고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소리치지만 않았다면.

“삼순아! 내가 잘못했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느닷없이 호텔 커피숍에서 벌어진 그 돌발사태에 커피숍 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 김삼순에게 쏟아졌다. 할렐루야.

***

크리스마스 날 애인에게 딱지를 맞은 후론 삼순은 어지간한 일엔 당황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벌어진 이 상황은 그 ‘어지간한’이라는 범주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거리로 따진다면 백두산과 제주도만큼이나, 아니다 지구와 화성만큼이라고 해야 할까.

“무, 무, 무슨 짓이에요! 이 남자가 정말!”

목소리가 나올 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삼순은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남자를 뿌리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녀가 뿌리칠수록 삼순의 포동한 몸을 안는 남자의 팔에는 더욱더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목소리는 더더욱 애절해졌다.

“내가 맞선을 본다고 너까지 나 보는 앞에서 이러면 어떻게 해? 집안에서 우릴 인정하시지 않지만 나한테는 너 뿐이야. 저 여잔, 어머니가 하도 성화를 부리셔서 어쩔 수 없이 딱 한 번 만나는 것 뿐이라니까. 믿어 줘!”

믿기는 내가 당신을 뭘, 어떻게 믿어? 환장하겠다. 이 남자는 어디서 드라마도 이런 3류 신파 드라마 자연을 연출하는 거야? 예전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이게 웬 떡이냐!’라면서 스킨 향이 언뜻 나는 그 남자의 커다란 몸을 마주 껴안았을 테지만 지금의 그녀에게 있어서 이 남자는 자신의 잘 되어가는 맞선에 초를 치고 있는 악당이었다. 문득, 악당의 어깨 너머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맞선 상대남의 얼굴이 보였다.

“아니예요! 재용 씨! ?에, 저 사람 이름이 오재용 맞지?- 이 남자가 지금 헛 수작 부리고 있는 거라고요!”

당장 그렇게 소리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불실에 닥친 재앙에 목소리도 나와주지 않았기에 삼순은 열심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그걸로는 이 난관을 뚫기에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남자는 황망한 얼굴로 커피숍을 나갔다. 나가버린 것이다! 삼순은 어쩌면 자신의 역사가, 운명이 될 수도 있었떤 남자의 등이 자신으로부터 멀어진 것을 피눈물을 흘리며 지켜 보았다. 그 순간 삼순을 안고 있던 도영 역시 자신의 맞선녀가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엔 차이점이 있었으니,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맞선 상대의 등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삼순의 표정보다 훨씬 느긋했다는 것이다. 맞선녀가 호텔 커피숍에서 완전히 떠나는 순간, 여자를 안고 있던 남자의 팔이 풀어졌다. 그는 얼떨떨한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무시한 채로 삼순에게 씨익 웃어보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맞선보기엔 아주 화창한 날씨죠. 삼순, 아니 희진씨?”

그러나 그의 그 여유만만한 표정은 채 5초도 못가서 끝장이 났다. 천하의 장도영이라도 뺨을 ‘짝’ 소리가 나게 얻어 맞는다면 그 백만 불 짜리 미소를 유지하기 힘든 법이다. 뒤이어 그녀의 날카로운 하이힐이 그의 정강이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남자는 그녀의 신속한 공격에 터져 나오려는 신음소리를 삼키며 여자의 손목을 붙들었다.

“이봐요! 김삼순...”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자신을 노려보는 여자의 눈동자, 그 붉게 충혈된 눈물 어린 눈동자를 보는 순간 딱 끊겨졌다. 눈물을 담고는 있지만 가까스로 흘리지 않은 채로 두 눈에 힘을 주면서 또박또박 그녀가 말했다.

“내가, 당신 눈에 그렇게 우습게 보여?”

순간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서 힘이 사라졌다. 여자는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그에게서 몸을 돌려 또각또각 선명한 하이힐 소리를 내면서 커피숍 밖으로 퇴장했다. 마치 자신의 맞선녀처럼 사라지는 삼순의 등을 도영은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러기를 20초, 맞선녀는 따라가지 않았던 그가 삼순을 따라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좀 천천히 가요. 안 그럴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이 발걸음이 무지 빠르네.”
“...”
“너무 부려먹는다 어쩌구 하더니 무슨 휴일 날 하루도 안 쉬고 선을 봐요?”
“...”
“그 호텔 괜찮죠? 뭐, 나도 그래서 거길 애용하는 편이지만.”
“...”

사실 여자 뒤꽁무니를 200m 이상 쫓아가면서 이렇게 지분지분 말을 거는 건 장도영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리 그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은 죄가 상당히 심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0분 전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어쩔 수 없이 또 그랬을 거라고 그는 생각한다. 이제 맞선업계에서 그도 악명을 쟁쟁하게 날릴 정도이건만, 이번의 그 여자는 정말로 마음을 독하게 먹고 나섰던지 웬만한 방법으론 떨어질 것 같지 않은 찰거머리 과였던 것이다. 강한 찰거머리에겐 강한 처치법이 필요했다. 바로 그 순간, 그 처치법을 찾는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가 있었으니, 건너 건너편에서 남자를 향해 배시시 웃고 있는 김삼순이었다. 그 뒤론 귀찮은 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해치우는 해적의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다행히도 효과는 탁월했다.

‘뭐, 대가로 뺨 한 대에 정강이까지 걷어차일 줄은 몰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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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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